건드리지 마라
건드리지 마라
  • 정규호 부국장<보은.옥천>
  • 승인 2011.07.28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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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규호 부국장<보은.옥천>

자신의 미모와 재주를 뽐내던 미모사 공주가 목동으로 변장한 태양신 아폴로와 그를 따르던 시종들의 아름다움에 부끄러워하다가 한 포기의 풀로 변했다. 그 풀의 이름은 미모사로, 그때부터 사람의 손길이 닿으면 몸을 움츠린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릴 적 교정 화단 가장자리에 다소곳하게 자리 잡은 풀 미모사를 자꾸 건드렸던 추억이 있다.

손가락 끝을 슬그머니 갖다 대기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라 잎을 오므리던 움직임에 이끌려 자꾸만 반복했던 심술.

그 장난은 내 딸들에게도 이어져 가끔 풀밭에서 미모사를 발견하면 손대는 일을 참을 수 없는 듯하다.

보은읍을 가로지르는 보청천 둑길에는 자귀나무가 줄지어 심어져 있다.

자귀나무는 미모사와 비슷한 성품을 지니고 있어 낮 동안에는 잎을 활짝 펼치고 있다가 밤이 되면 잎을 오므린다.

이러한 속성 때문에 자귀나무를 합환수라 하여 오래전부터 안채 마당에 심었다.

식물들도 이처럼 온몸으로 이야기를 한다.

미모사를 거듭 건드리다가 “움츠렸다 폈다 하느라 무척 힘들겠다.”고 말하는 어린 딸의 천진난만함에 문득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는 지난 2001년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는 책을 펴냈다.

그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책 제목에 이끌려 단숨에 그 책을 독파한 적이 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는 지극히 평범하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진리의 명제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살아왔음이 어처구니없다.

‘서울이 잠겼다’거나 ‘서울을 할퀴다’라는 날카로운 제목들로 신문은 엄청난 폭우의 재앙을 말한다.

거기에는 ‘서울’이 보통의 것이 아닌 아주 별다른 특별함의 존재임을 은연중에 강조하는 속내가 있다. 하기야 서울이 어찌 보통일 수 있겠는가. 대한민국의 수도요, 오죽하면 이름조차 서울특별시 아닌가.

그런 서울에 깊은 상처를 입힌 그 엄청난 폭우는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재앙을 가져오는 자연의 무자비함은 결국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고급 예술의 향기가 넘쳐나는 예술의 전당이 있고, 국악방송과 교육방송이 있는 서울 우면산 자락은 인간의 풍요에 대한 그치지 않는 욕망이 차지한 공간이다.

거기에는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는 보편성과 공존, 그리고 공생보다는 오로지 내 것, 나만 보고 즐기며, 그 아름다운 풍광조차 기어이 내 집 앞마당으로 삼아야 직성이 풀리는 탐욕이 있어 온 것은 아닌지 곰곰이 따져 봐야 한다.

요 며칠 지구가 심상치 않다. 평화의 나라 노르웨이에서의 참극은 차마 인간이 저지른 짓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속도를 최우선 순위로 삼아왔던 중국의 특급열차는 서 있는 앞 열차를 뒤따르던 열차가 들이받고 추락했다.

그리고 끊일 듯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게릴라성 폭우와 긴 장마는 그저 기상이변이라는 이름 아래 속수무책이다.

아니다. 그게 왜 속수무책인가. 그런 자연의 이상 징후는 아름다움을 나만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는 욕심과 절제되지 않고 마구 사용하는 화석연료에 대한 자연의 거부감이 원인이 아닌가.

건드리지 마라. 건드리지 마라. 지칠 대로 지친 자연은 이 여름 시름 깊은 폭우로 사람들에게 말한다.

작은 손짓에도 소스라치게 놀라 잎을 오므리는 미모사는 이제 햇살이 한층 그리울 터이고, 자귀나무는 분홍색 깃털 닮은 꽃을 피우려 하는데. 이 모든 아름다운 생명을 자연의 재앙에 힘없이 내놓을 수밖에 없는 사람의 나약함은 대자연과 더불어 통곡하고 있다.

사람들은 곧 이런 서러움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채 자꾸만 자연과 생명을 건드리면서 ‘우리’가 아닌 ‘나’만을 반복해 생각하는 무모함에 익숙해질 것이다. 그리고 당분간 비는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우울한 소식의 이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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