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마음
첫 마음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1.07.04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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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애 <수필가>

오늘따라 그가 내 안에 가득하다. 밀물이듯이/밤새 내 머리맡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마치 터질 것만 같이 가슴이 벅차오르다니/내가 그의 거처가 되고 그릇이 된다는 것은/얼마나 행복한 일인가/그의 이름만 불러도 내 눈에 금세 눈물이 넘쳐흐름은,/이미 그가 내 안에 아침 꽃잎으로 흐드러지게/피어 있는 까닭이리.(양성우의 아침 꽃잎 전문)

시를 읽으며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어두운 시대 민주화를 이끌던 그릇에 그리움과 사랑이 담뿍 담겨 있다. 첫 마음으로 돌아간 그가 아름답다. 음반을 건다. 잊었던 멜로디들이 익숙하게 살아나며 집 안의 고요를 깨운다. 감정이 널뛰듯 오르내리던 마음자리에 오늘은 잔잔한 기쁨이 고인다. 첫 마음으로 다시 '論語'를 연 내 안에는 새벽에 필사했던 삼락(三樂) 구절이 가득하다.

'학문은 자신에게 달려 있고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음은 남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어찌 서운해 할 것이 있는가, (중략) 그러나 덕(德)이 이루어지는 소이(所以)는 또한 학문이 올바라야 하고, 익히기를 익숙히 하고, 기뻐하기를 깊이 하여 그치지 않음에 말미암을 뿐이다.'(學在己知不知在人何 之有……德之所以成亦曰學之正習之熟說之深而不已焉耳 )

천천히 읽으며 의미를 새기고 정성스레 필사를 하다 보니 옛 성인의 말씀이 가슴으로 젖어들며 예전에 알지 못했던 기쁨이 솟는다. 십여 년 전 처음 경서강독을 시작했을 땐 모르는 한자를 익히고 문맥을 파악하기에도 버거워 글에 담긴 뜻을 깊이 새기지 못했다. 선생님이 어떤 문장을 강독시킬지 몰라 잔뜩 긴장해서는 그 시간이 무사히 지나기만을 바랐다. 그렇게 몇 해 따라가며 사서 강독을 마쳤지만 읽기 전이나 읽은 후나 사람의 깊이가 달라짐이 없으니 논어 서설(序說)에 나오듯 읽지 않음과 다를 바 없다. '논어읽기를 더욱 오래할수록 다만 의미가 심장함을 느낄 뿐'이라는 程子의 말을 빌려 논어가 주는 깊이와 감동을 역설하시며 첫 마음을 잃지 말라던 미수(米壽)의 스승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말씀은 삶에 부대끼면서도 늘 숙제처럼 가슴에 남아 잊히지 않았다.

언젠가는 다시 하고 미뤄두었던 논어를 다시 펼쳐든 건 숙제에 대한 부담감도 있지만 책읽기를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면서 마음공부도 해야겠다는 작은 계획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나의 책읽기는 책을 좋아한다는 말이 부끄러울 만큼 철학적 성찰보다는 지식을 탐하기에 바빴다. 보이는 대로 읽고 책을 덮는 순간 잊어버리면서도 마음속으론 혼자만 대단한 학식을 갖춘 양 자존심을 세웠으니 우습기 짝이 없다. 올해 유난히 그런 겉치레가 부끄러워지면서 도서관에서 열리는 인문학강좌를 빌미로 건성으로 읽었던 고전들에 도전장을 던졌다. 강의 외에는 외출도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전화도 조용하다. 원칙이 존재하지 않는 정치 이야기도 흘려버리고, 공연히 다른 이의 마음을 짐작으로 추측하곤 속앓이 하는 어리석음도 사라지니 마음이 호수처럼 깊어지는 듯하다. 책 속에 묻혀 있는 시간과 분주하게 일하는 시간으로 단순하게 반복되는 일상에 익숙해져 간다. 그 고요가 참 좋다. 배움에 있어 낙(樂)의 경지엔 오르지 못하더라도 열(悅) 가까이라도 갈 수 있기를 꿈꾸며 첫 마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지금, 빗소리조차 경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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