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글살이와 삶씨 이야기
말글살이와 삶씨 이야기
  • 김태종 <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 승인 2011.07.03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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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태종 <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우리말'이라고 입 밖에 내어놓으면 얼른 떠오르는 것이 60년대에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거지들이 입고 다니던 옷이 떠오릅니다. 어디서 났는지 알 수 없는데, 대개가 군복을 입은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말이 군복이지 하도 낡고 헤져서 이리저리 타개지고, 찢어지고, 구멍난 것을 깁고, 꿰매고, 덧대어 살을 감싸려고 하다 보니 바탕이 무엇이었는지 가늠이 잘 안 되는 그런 옷이었습니다. 게다가 덧댄 헝겊은 나일론도 있고, 광목도 있고, 포플린도 있는 데다가 바느질 솜씨도 신통치 않았으니 그 볼꼴사나움이야 따로 뭐라고 하지 않아도 그림이 처억하니 나오는 그런 꼴이었습니다.

우리말이 꼭 그 꼴입니다. 그래서 우리말을 떠올릴 때마다 절로 한숨이 나오는 것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있는 우리말이 흐트러진 것은 한문과 섞인 것이면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지배계급이 한문을 쓰면서 그런 말투를 쓰는 것이 잘난 것으로 보는 인식은 말글살이의 흐트러뜨림을 더욱 부채질했을 것입니다. 이때 내게는 '최만리'라는 이름이 먼저 떠오릅니다.

거기다가 일본말이 겹치면서 문제는 그만큼 복잡해졌습니다. 60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일본의 발굽 아래 놓여 있는 동안 우리말은 빨래하기가 몹시 어려운 찐득한 때투성이로 얼룩지게 되었습니다. 아무 데나 식당에 가면 볼 수 있는 '닭도리탕'이라는 먹을거리 이름을 볼 때마다 나는 입맛을 잃습니다.'도리'가 일본말이라는 것, 그 뜻은 '닭'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하면 듣는 이 가운데 귀 달린 사람은 어이없는 웃음을 안 웃고 배길 수 없습니다. 더구나 어이가 없었던 것은 일본에 갔다가 가방을 잃어버렸을 때입니다. 가방이라는 말을 영어로 하면서 잃어버렸다고 한참 설명을 하는데, 내 어줍잖은 영어를 듣던 일본 사람이 내 뱉은 말 한마디에 까만 내 얼굴이 질려서 그만 하얗게 되고 말았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고, 그걸 떠올릴 때마다 아득한 어지럼을 타곤 합니다.

도대체 뭐라고 했기에 그렇게 사설을 길게 늘어놓느냐고 물을 사람도 내 말을 들으면 고개를 주억거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 일본 사람이 내 설명을 한참 듣다가 '아 가방' 했습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는데, 글쎄 그놈의 '가방'이라는 말이 일본말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광복을 전후로 하여 영어가 들어오고, 독일이나 프랑스, 이탈리아 같은 바깥 나라에 가서 공부를 한 사람들이 돌아와 그만해도 사납게 어지러워진 우리말을 더욱 어지럽혔고, 표준말을 쓰자고 하면서 고을말을 쓰지 못하게 했던 말의 획일화, 글말과 입말의 사이가 자꾸 멀어진 일, 군사독재 시절의 말도 안 되는 억지 문법정리까지 가세를 했고, 여기에 장사꾼들의 말 오·남용과 정보통신과 잇대어진 말투들까지 끼어들면서 마침내 오늘의 누더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말에 얽힌 삶씨로서의 말씨를 말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되지도 않을 수작을 부리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말을 사랑하지 않고는 삶씨를 얘기할 수가 없으니 말씨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습니다. 말이 살아나면 얼이 살아납니다.

말과 얼이 만나는 자리에서 삶씨가 풀려나옵니다. 말은 삶씨를 담는 그릇이지만, 또한 얼을 담는 그릇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오늘날의 우리 말글살이를 보면 우리의 얼과 삶씨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를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바람직한 삶씨를 펼쳐내려면 먼저 말글살이를 다듬고 닦아야 합니다. 거기서 겨레얼이 힘을 얻을 터이고, 그 자리에서 피어나는 삶씨는 무늬가 고울 수밖에 없을 터, 그래서 아직도 이울지 않은 우리말을 입 안에 넣고 우물거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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