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사성을 파직시킨 황희의 '청탁'
맹사성을 파직시킨 황희의 '청탁'
  • 조한필 부국장<천안·아산>
  • 승인 2011.07.03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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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조한필 부국장<천안·아산>

584년 전 7월, 천안·아산지역을 뒤흔든 사건이 있었다. 우의정에 막 오른 맹사성과 좌의정 황희가 함께 파직되고, 형조의 판서·참판·좌랑과 대사헌이 귀양을 갔다. 맹사성(1360~1438)이 누구인가. 아산시 신창이 본관인 그는 청백리의 표상이다. 아산 배방읍 중리에 있는 맹씨고택은 청렴한 공직자의 성역지로 통한다. 더 충격적인 것은 온양·신창·직산·목천 등 이 일대의 지방수령 대부분이 곤장 1백대와 징역 3년형에 처해진다. 조선왕조실록 1427년(세종 9년) 6월 21일 조(음력)에 상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황희 정승의 사위가 문제였다. 그는 신창현의 무고한 아전(하급관리)을 하인들과 함께 폭행해 죽여 수사를 받게 됐다. 황희가 신창 출신인 맹사성에게 원만한 사건 해결을 청탁한다. 맹사성은 죽은 아전의 형을 불러 "우리 고향(신창)의 풍속을 아름답지 않게 하지 말라(毋使鄕風不美)"고 '압력'을 넣었다. 불미스러운 일은 그냥 덮어두자는 얘기다.

정승의 입김은 셌다. 재판에 참여했던 인근 고을 수령인 온양·직산·목천 현감이 황희 사위는 빼고 '폭행치사죄'를 하인에게 뒤집어씌웠다. 그리고 신창현감은 죽은 아전의 형을 통해 피살자 가족으로부터 합의서(私和狀)를 받아냈다.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가 없고, 본 고을 출신 재상(맹사성)과 현임 수령의 명령을 아전으로서 순종하지 않으면 나중에 몸을 어디다 둘 수 있겠느냐.(死者不可復生.本鄕宰相時任守令之命, 以吏不從, 終置身何地)" 협박 수준의 얘기를 한 후 받아 낸 것이다.

사건이 거의 마무리되던 순간, 최종 조서를 살피던 세종이 사건 앞뒤가 맞지 않는 걸 수상히 여겨 의금부(최고 사법기관)에 재수사를 명령했다. 세종은 역시 현군이었다. 그래서 사건 7개월 만에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진실 왜곡을 간접 지시한 정승 2명과 장·차관급 2명 및 지방 현감들이 무더기로 파직되고 귀양가고 징역형을 받았다.

장황하지만 오래전 사건을 들춰본 데는 이유가 있다. 한 사람의 잘못된 선택이 지역에 얼마나 큰 파장을 몰고 왔는가 되새겨 보자는 뜻이다. 당시 맹사성은 황희 정승의 청탁을 물리쳤어야 한다. 시골 아전이 불손하게 대했다고 행패를 부리다 사람까지 죽인 권세가의 망나니(형조판서 아들)를 보호했어야만 했나 그 때문에 고향 관리들을 몽땅 파면·곤장·징역형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지난달 28일 천안 공직자 비리 사건의 관련자 14명이 몽땅 기소됐다. 수뢰 공직자 7명과 그들에게 돈을 준 사업자 7명이 줄줄이 법정에 서게 된다. 그 중심에 최모 전 천안시 환경사업소장이 있다. 그의 탐욕(4억8000만원 수뢰)에 총무과장 등 공직자 2명과 뇌물 공여자 5명이 엮였다. 이들은 서로 도와 챙기고 챙겨줬다.

그중에 네 차례에 걸친 수뢰 혐의를 모두 부인하는 경찰 간부가 있다. 준 사람은 있는데 받은 사람은 없다. 의금부가 황희 사위의 죄를 밝혀냈듯이 공판 과정에서 사실 여부가 드러날 것이다.

황희는 황금 등을 뇌물로 받아 탄핵을 당한 것과 달리 맹사성은 평생을 청빈하게 살았다. 한국 역사를 통틀어 청백리로 추앙받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태종 때인 1409년 대사헌으로 왕의 사위까지 호되게 다루는 우직함으로 죽을 고비를 맞기도 했다. 이런 그도 말년에 동료 청탁은 이기지 못했다.

포털사이트엔 "당시 간신들 상소로 오해를 받아 파면당했다"고 맹사성을 옹호한 글이 올라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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