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 김태종 <생태교육연구소 소장>
  • 승인 2011.05.26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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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태종 <생태교육연구소 소장>

어렸을 때 나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왠지 호기심이 있었던 것은 다섯 살의 가을로 기억되는 어느 날 내가 맞았던 최초의 회초리와 함께였습니다.

누군가가 죽어 마침 그날 상여가 나갔는데, 그 무렵 다들 그랬듯이 상여 뒤를 여러 아이들이 주욱 따라 나섰고, 좀 멀다 싶은 생각이 드는 아이마다 하나씩 떨어져 나가 다른 아이들은 아무도 장지까지는 가지 않았는데 나는 거기까지 따라가 제사를 지내는 것이며, 무덤을 만드는 것, 그리고 그에 뒤이은 하관 모습까지를 낱낱이 다 보며 신기해 했고, 까닭 모를 들뜸으로 팔짝팔짝 뛰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돌아오며 내가 본 것들을 어머니께 이야기해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들어서자 입을 떼기도 전에 어머니가 노한 얼굴로 부지깽이를 들고 종아리를 걷으라고 하는 겁니다. 그때부터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그런 데를 따라 간 것에 대한 어떤 금기를 알려주려는 회초리질이었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고 그저 말도 없이 어딘가에 가서 너무 오래 있었다는 질책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 뒤 여기까지 살아오면서 적지 않은 죽음을 보기도 하고,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안타까움이 드는 건 자신도 모르는 죽음을 가지고 산 사람을 얽어매기도 하고, 그것을 빌미 삼아서 말도 안 되는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과, 죽음 이후에 대해 말도 안 되는 갖가지 말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또는 죽음 이후에 대해 이런 저런 거짓말임이 틀림없을 말들을 되는대로 지껄여 대는 사람들, 그리고 죽음이 코앞인데도 마치 수십, 수백 년을 더 살 것처럼 말하거나 행동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누구에게나 죽음이 다가오고 있고, 그것이 결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헤아린다면 자기 삶에 대해 좀 더 정직해질 수 있고, 현실 앞에 겸허해질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바탕에 있는 까닭입니다.

살아 있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죽음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날숨이 그렇고 배설이 그러하며 지는 해도 또한 죽음의 한 형태일 것이고, 때로 만났던 사람과 헤어지는 일도 죽음의 모습을 지니고 있음을 보면서 여기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럼에도 죽음을 모를 때는 그것이 두려움이 되기도 하고, 자신과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에서는 아쉬움과 함께 슬픔을 느끼기도 하는데, 들숨에는 반드시 날숨이 뒤따르고, 섭취한 것이 있으면 마침내 배설이 필연인 것처럼 살아 있음에는 죽음이 전제되어 있다는 걸 잊는다면 사람다움의 한 요소는 놓치는 일임도 염두에 두어야 보다 자신에게 정직해질 수 있다는 말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죽음이 아름답다는 것을 제법 보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숨을 쉬는 이에게 축하를 해 주는 전송과 그에 대한 화답으로서의 숨 내려놓음이 아름다울 수 있는 자리를 그려보곤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역할이나 기능에 충실한 것 못지않게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사는 일이 그만큼 중요할 터이고, 자신에게 충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일이야말로 삶의 알맹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이쯤에서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해 지는 모습의 아름다움처럼 우리의 마지막도 그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축제로서의 죽음이야말로 성숙한 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람살이의 모습이라고 쳐 본다면 아직은 아니지만 인류는 충분히 그런 세계를 열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미래를 내다보며 죽음에 대한 생각을 접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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