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48>
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48>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5.30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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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식사 후 호텔을 나와 근처에 있는 박물관에 들렸다. 2층으로 된 아담한 박물관으로 소장품은 그리 많지가 않았다. 둔황에 대한 유물을 둘러본 후 호텔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저녁 6시 쯤에 밍사산으로 향했다. 입구 주변엔 선물가계가 늘어서 있고 황사가 휘날려 하늘이 희뿌였다. 매표소를 지나 위에야추안으로 들어서 갔다(입장료 50元). 입구를 들어서자 낙타 떼들이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다. 앞쪽엔 해발 1650m의 거대한 밍사산 모래언덕이 우뚝 솟아 있다.

밍사산에서 몇 킬로 떨어져 있지 않은 사막 한가운데 초승달 모양으로 형성된 위에야추안(月牙泉)이 나타났다.
제일천(第一泉)이란 검은 비석 바위에 도착했다.

사막 한가운데 누각이 나타나고 우측으로 위에야추안이 보였다.

초승달 모양의 위에야추안 주변은 갈대가 자라고 있고 5층 누각 주변에는 잘 조경된 꽃과 잔디와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위에야추안 주변은 모래 산에 둘러싸여 있다.

예쁘게 디자인한 철책 울타리 한가운데 남색 빛을 띤 초승달 호수가 신비롭게 누워 있다.

길이 240m에 넓이 39m, 높이가 2m인 자연 오아시스인 위에야추안은 사막 한가운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천 년 전부터 이제껏 한 차례도 모래에 파묻힌 적이 없었고 샘도 마르지 않았다 한다.

신비로운 이런 자연 현상은 호수주위에 부는 바람으로 인해 모래가 호수로 날아오지 못하게 하는 주변의 특수한 지리적 조건 때문이라고 한다.

하룻밤에도 지형이 바뀌는 사막 한가운데서 수 천년 동안 샘이 마르지 않고, 호수가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있다는 건 신비로운 기적이다.

수많은 오아시스 여행객들이 목을 축이고 가축들이 쉬어가는 생명의 감로수가 아직도 샘솟고 있다.

위에야추안 앞산 밍사산 모래 언덕에 나무사다리 계단을 설치하고 그곳으로 올라가 산정부근에서 모래 스키를 타고 내려오는 모습이 퍽 이채롭다.

산꼭대기에서 미끄럼 타고 내려오는 모습은 희뿌연 모래바람에 가려 더욱 호기심을 자아내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밍사산은 모래바람에 가려 희미한 윤곽만 보였다.

하늘이 도와주지 않았다.

사진을 담아갈 수 없을 만큼 날씨가 좋지 않아 일정을 하루 더 연장하기로 하고 밍사산 등정을 포기했다.

저녁은 야시장 구경을 하였다.

회족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노점에서 양고기 꼬치구이에다 깐수성 맥주를 곁들여 마셨다.

중국 전역에서 맛볼 수 있는 양고기 꼬치구이는 주로 회족들이 파는 음식으로 우리 입맛에 비교적 잘 맞았다.

사막 지대라 그런지 깐수성은 차 인심이 좋은 것 같다.

식당에서 찻잔을 비우면 종업원이 달려와 빈 잔을 채워주는 넉넉한 모습들이 난저우와 둔황에서 매우 인상 깊게 느껴졌다.

상하이와 쑤저우, 항저우는 음식 값에 차 값을 포함시켜 너무 야박하다는 인상을 준 반면에 둔황에서는 오아시스의 넉넉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호텔인근의 비천반점(飛天飯店) 주변 몇 개의 음식점에는 한국인이나 일본인들을 위한 음식 메뉴를 갖추고 있다.

둔황은 일본인들이 특히 좋아하는 탐방지이고 한국인들도 많이 방문하고 있다.

야시장과 소박한 둔황시가지를 걸어 다니며 야경을 즐겼다.

불교가 국교였던 당나라 시대의 둔황의 모습을 상상하며 전 세계에 흩어져 남아있는 11세기 이전의 실크로드 필사본 5만여 점 이상을 인터넷에 제공하고 있는 Susan Whitfield의 승려와 화공과 기생이야기를 떠올려 보았다.

◇승려 춧다 이야기 (Ⅰ)승려 춧다는 카슈미르 출신이다.

어린 몸으로 히말라야의 카슈미르 왕국에 있는 사원에 들어가 20대에 계(戒)를 받고 비구가 되었다.

9세기에는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 북부가 대부분 투르크와 힌두 왕조의 지배 아래 놓여있어 불교는 차츰 쇠퇴하고 있었다.

카슈미르를 지배하고 있는 카르코타 왕조는 힌두교였지만 불교에는 상당히 너그러웠다.

춧다가 불문에 들어간 것은 신념에 바탕을 둔 위대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생활방편이었다.

그렇다고 춧다가 불심이 전혀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춧다는 계율을 엄수하겠다고 서약을 했고 예불에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중국에 다녀온 적이 있는 승려들은 중국 법당에서 찬불가를 부르다 격정에 사로잡히면 일부 승려들이 제 팔을 지지거나 손가락을 불에 태워 부처의 이름으로 자신을 불구로 만든다고 말해주었다.

동시대 유럽의 카톨릭 수도사는 욕정에 사로잡힌 마음을 다잡기 위해 촛불에 손가락을 하나씩 차례로 태웠다는 얘기도 들었다.
   

중국의 한 승려는 스스로 성기를 잘랐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자신을 거세한 승려에게 그 후 수천 명의 군중이 몰려 설법을 청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여행을 꿈꾸던 춧다는 마침내 855년 봄에 중국 수도 장안 북동쪽에 있는 우타이(五臺)산으로 순례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우타이 산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음에도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이승에 남아 있는 유명한 문수보살의 정처지였다.

중국의 수도까지 5000km에 이르는 거리로 거기서 우타이 산까지는 수백km를 더 가야 한다.

거기까지 갔다가 돌아오려면 1년도 넘게 걸릴 정도였다.

춧다가 종자(從者)와 함께 카슈미르의 사원을 떠난 것은 늦봄이었다.

아소카 왕 시절 불교의 중심지였던 탁실라에 들렸을 때 3∼5세기경 쯤 북쪽에서 쳐들어온 유목민들은 탁실라를 무자비하게 파괴했고 도시 안팎이 거의 폐허로 변해있었다.

춧다와 종자는 탁실라에서 여러 곳을 방문한 뒤 다시 길을 떠났다.

훈드에서 인더스 골짜기를 들어간 다음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 아소카 왕이 마캄 강변에 남긴 명문을 순례하고 말라칸드 고개를 넘어 스와트 강에 이르렀다.

골짜기에는 아직도 많은 승려들이 살고 있었지만, 그 수는 과거에 비해 현저히 줄어 있었다.

7세기에 이곳을 방문한 승려는 사찰이 1400개요 승려가 1만 8000명이라고 기록했다.

이곳 골짜기에 태어난 파드마상바바라는 8세기 중엽에 티베트 황제의 초청을 받고 가서 독특한 복장 때문에 홍모파(紅帽波)라고 불리는 새 종파를 창시했다.

많은 험지와 사막을 경유하여 야르칸트에서 그들은 호탄으로 옥을 사러가는 소그디아나 상인들을 만나 그들과 동행하기로 했다.

호탄은 쿤룬산맥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카라카슈 강과 유룽카슈 강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호탄에서 나는 옥은 빛깔이 초록색에서부터 하얀색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는데, 예부터 호탄옥은 중국에서 유명했다.

두 순례자는 호탄에서 몇 주 동안 휴식을 취했다.

호탄은 활기찬 불교중심지여서 대규모 승려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참석할 만한 법회와 볼만한 유적지가 많았다.

호탄 왕국의 신상은 대부분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다.

보관(寶冠)을 쓴 불상은 카슈미르에서 왔고 백단을 조각한 10m 높이의 또 다른 불상에는 병자들이 몰려들었다.

병자가 자신의 환부에 해당하는 불상부위에 금박을 붙이면 병이 나았다.

이 불상은 부처가 살아있을 때 인도 중앙부에서 조각되었고, 부처가 열반한 뒤 저절로 호탄까지 날아왔다고 한다.

호탄은 전설로 가득 차 있는 왕국이다.

쳐들어오는 유목민의 말고삐를 쥐들이 갉아먹어 나라를 구했다는 이야기와 중국 공주가 누에고치와 뽕나무 씨를 머리 장식 속에 숨겨서 중국에서 몰래 가지고 나왔다는 이야기, 귀족 청년이 그 땅의 용과 결혼하여 강물이 다시 흐르게 되어 그 덕분에 도시가 활기를 되찾았다는 이야기 등이 모두 기념비와 그림에 기록되어 있었다.

/시인·극동정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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