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국(小菊)을 심으며
소국(小菊)을 심으며
  • 정효준 <광혜원성당 신부>
  • 승인 2011.04.18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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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목소리
정효준 <광혜원성당 신부>

죽은 듯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던 나무들이 잎을 내고, 이곳저곳에서 꽃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저희 성당은 산 중턱에 자리를 잡아서 이런 변화들을 쉽게 접하게 됩니다. 식물들의 이런 힘찬 시작이 우리의 지쳐가는 삶에 다시금 힘을 불어넣어 줬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아버지께서 꽤 많은 양의 소국(小菊) 포기들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농업고등학교 학생들이 학습 교재로 쓰고 남은 것부터 1차, 2차 포기 나눔 한 것들을 성당에 가져다 주신 것입니다. 솔직히 직접 땅을 파고 무엇인가를 심어본 기억이 없는 저는 난감했습니다. 인터넷으로 이것저것을 알아보고 화원에 가서 화분과 배양토를 사 왔습니다. 정성스럽게 화분에 옮겨 심었는데 작업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작업을 하는데 나름 보람도 있고, 재미도 있었습니다. 사 온 화분에 다 심고도 꽤 남았습니다. 그래서 마당 한 구석 땅을 잘 다지고 양분을 섞어서 어느 정도의 공간을 확보했습니다. 그곳에도 일정한 간격으로 심었습니다. 심는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는지 그 공간을 채우고도 조금 남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억지로 공간을 조금 넓혀서 그곳에 몇 개를 심고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반나절을 공들여 작업을 하고 화분을 알맞은 장소에 배치하고 나니 뿌듯했습니다. 꽃이 활짝 필 날을 상상하며 콧노래와 환한 미소로 물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좋지 않은 땅에 심어진 몇 그루의 소국이었습니다. 얼른 가서 배양토를 더 사 올까도 생각했지만 잘 자라 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도구들을 정리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물을 주기 위해 화단에 갔습니다. 처음으로 눈길이 간 곳은 다름 아닌 좋지 않은 땅에 심어진 몇 그루의 소국이었습니다. 그곳에 제일 먼저 물을 주고, 마지막으로 눈길을 한 번 더 준 다음에야 돌아섰습니다. 시간이 지나 꽃망울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가지마다 수북하게 꽃이 올라와 주변이 다 환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좋지 못한 땅에 심어진 소국에 꽃망울이 터지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배양토를 더 섞어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 정성에 보답하듯 삼 일 정도 지나자 꽃망울을 터뜨려 주었습니다. 비록 다른 소국보다는 적은 양의 꽃이었지만 매우 고마웠고 더 큰 기쁨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런데 적은 양의 꽃을 피운 소국의 주변의 꽃들은 많은 양분이 있었음에도 중간 부분의 소국보다는 적은 양의 꽃을 피웠습니다. 그래서 가장자리의 소국이 초라해 보이지 않고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멋진 화단이 되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옥한 땅에 심어진 소국이 양분을 나누어, 그렇지 않은 친구들의 꽃을 피우게 했구나.'

그날 저녁 꽃들에게 얻은 고마움과 기쁨을 안고 성당에 조용히 앉았습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서 속삭여 주십니다. 인간에게 허락된 고통이 어떤 의미인 줄 알겠냐고 말입니다. 바로 그 고통은 더 큰 사랑을 받기 위한 도구였던 것입니다. 좋지 못한 땅에 심어진 소국에 가장 먼저 물을 주고 응원을 보냈던 내 모습이 바로 힘겨운 삶에 지쳐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그분의 눈길이었고, 그분의 사랑임을 다시금 새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렵게 꽃을 피워낸 그 소국이, 비록 적은 양일지라도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더 큰 기쁨을 주었던 것처럼 그분에게도 마찬가지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요즘 교회는 신앙 고백의 핵심인 예수님 부활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부활을 영광에 앞서 이번 주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고통에 함께합니다. 고통에 동참한다는 것은 생활 속의 절제를 통해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웃을 돌아보도록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비단 그리스도인에게만 부여된 임무는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하는 이 넓은 세상이라는 화단에서 서로의 양분을 나눠 모두가 각자의 꽃을 피우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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