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기억
  • 김송순 <동화작가>
  • 승인 2011.03.14 22: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 김송순 <동화작가>
김송순 <동화작가>

추운 겨울이 다 지나갔는가 싶었는데 꽃샘추위도 만만치 않다. 역시 봄이 오는 길은 참 멀기만 한가보다. 하긴, 귀한 것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겠지. 그런데도 우리 집에는 봄이 한창이다. 추운 겨울을 무사히 견디어 낸 군자란이 주홍색 꽃망울을 터트린 것이다.

나는 아침 일찍부터 군자란 주변을 맴돌며 이리저리 꽃송이를 들여다보기에 바쁘다. 백합 같은 진한 향기는 없지만, 녹색 이파리 사이로 꼿꼿하게 올라온 꽃대며 8장으로 이루어진 주황색 꽃잎! 그렇게도 추웠던 겨울을 잘 견디어주었고, 또 올해도 잊지 않고 이렇게 우리 가족에게 봄소식을 전해주니 그저 고맙기만 하다.

하지만 난 군자란 속에서 봄 향기 보다는 친정아버지 모습을 먼저 찾고 있었다. 기다란 녹색 이파리에서는 키가 크고 날씬했던 아버지 모습을 보고, 주홍색 꽃잎 속의 노란색 꽃술 사이로는 노란색 줄무늬 남방을 즐겨 입던 아버지의 잘생긴 얼굴을 마주한다.

이런 내 마음을 눈치 챘는지 출근 준비를 하던 남편이 내 등 뒤에 대고 한마디 한다.

"그 군자란 장인어른이 갖다 주셨지? 군자란 꽃이 필 때면 돌아가신 장인 어른이 꼭 우리 집에 들르신 것 같다니깐. 아버님 돌아가시고는 해마다 꽃 이 피는 걸 보면 말이야."

"그러게. 우리 아버지도 참…. 막내딸이 보고 싶으신가?"

난 말끝을 흐리며 남편이 현관문을 나설 때까지 꽃송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버지!"

오랜만에 불러보는 아버지다. 오랜만에 기억해보는 아버지 얼굴이다. 언제나 부족한 딸 때문에 걱정이 많으셨던 우리 아버지였는데.

아버지가 떠나신지도 벌써 7년이 넘어서고 있다. 그 때는 아버지 생각만 해도 눈물이 앞을 가렸는데 지금은 애써 기억을 해야만 생각나는 아버지 얼굴이다.

잊는다는 것, 그리고 잊힌다는 것은 슬픈 일인 것 같다.

언젠가 읽었던 동화가 생각난다. 제목은 모르겠는데, 동화의 내용 중에 죽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특별한 곳이 있었다는 것은 기억난다. 그 곳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과 죽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의 중간쯤 되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 중간쯤 되는 곳에 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 만이었다.

그래서 그 특별한 곳에 사는 사람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죽은 자기들을 기억해 주길 바랬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은 죽은 이들을 차츰차츰 잊어갔다. 그러면서 중간 세상에 살던 사람들은 하나 둘 죽은 사람들이 사는 어두운 세상으로 물방울처럼 사라져간다는 내용이었다.

그 동화 속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우리 아버지는 지금 어느 세상에서 살고 있을까?

욕심 같아서는 중간쯤 되는 세상에 살고 계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보지만 자신이 없다. 저 군자란 꽃이 다 지고나면 나는 또 아버지를 잊고 지낼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오늘은 아무데도 가지 않고 군자란 주변만 맴돌 생각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