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설에 마음 싣고
춘설에 마음 싣고
  • 정상옥 <수필가>
  • 승인 2011.03.07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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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상옥 <수필가>

멀리 보이는 앞산 봉우리가 온통 새하얗다. 입춘도 지나고 우수도 지났건만 무슨 미련인지 겨울의 잔재는 아직도 떠나질 못하고 머물고 있다. 엊그제 내린 함박눈을 간절기의 짓궂은 장난으로만 이해하기엔 체온으로 느껴지는 추위가 매섭기만 하다. 봄의 초입에서 불어오는 샛바람이 한겨울 찬바람보다도 더 스산하게 느껴진다.

겨우내 여미고 있던 몸과 마음이 답답하던 차 혼자서 나선 산책길에 문득 외로움이 엄습하는 건 어인 일인지. 아무도 없는 시간의 조용함을 참 많이도 즐기며 살아온 나였는데 그 순간 혼자 나온 것이 못내 후회되는 것은 어느덧 나이가 들었단 말인가. 시끌벅적대는 산만함에는 진즉 적응치 못하는 천성이며 적막함에 오히려 더 마음을 주고 즐기는 심성이라 생각했던 건 나 자신조차도 나를 잘 알지 못하는 섣부른 용단이었는지.

하얀 눈을 덮고 고요해진 산등성이를 바라보다 문득 물음표를 던져본다. 나는 누군가에게 뒤틀린 심사를 지그시 누르고 한 번쯤 침묵하며 용서한 적이 있었던가. 찬바람 탓에 체감도 뚝 떨어졌지만 마음이 더 서늘해지는 건 자신이 베푼 사랑보다 더 많이, 더 크게 되돌려 받으려는 욕심이 먼저 눈을 흐리게 한 탓도 있으리라. 배려의 마음을 옹졸하게 옭아매고 황량한 벌판에 마지막 남은 억새풀처럼 오만과 과욕의 바람이 가슴을 스칠 때마다 서걱서걱 마른 울음을 토해내며 증오와 미움만을 키우지 않았는지. 그 눈물이 진자리에는 과실을 회개하는 자각도 있었지만 아집으로 뭉쳐진 편협한 마음의 잣대로 상대에게 얼마큼 큰 생채기를 남겼을까. 늦어서야 깨달았을 땐 오늘처럼 후회가 꽃샘바람보다 더 마음을 시리게 했던 것을…….

혼자서 천천히 걸으며 산속에 들고 보면 잠재우지 못하던 욕심도 살며시 사그라지고 부질없던 것에 집착하며 살아온 뒤안길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을 때마다 삶 속의 모든 과욕과 집착에서 벗어나길 결심하며 가슴속 끈을 느슨하게 풀어보지만 어느 순간 돌아보면 내 편에만 유리하도록 더 촘촘히 엮어놓은 이기심을 어찌하랴. 그럴 때마다 정말 절실하게 교화와 위로가 됐던 것은 혼자만의 고독한 시간을 갖는 것이었다.

내가 가끔씩 홀로 즐기는 고독은 절망적인 외로움에 빠져들기보다는 조용한 시간이 주는 고요 속에서 오롯이 나를 돌아보기 위함이었다. 또 그 시간은 내면에서 찌든 허욕의 때를 벗겨내는 마음속 거울 닦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발길이 북적대며 늘 머물게 하던 등산길도 봄눈 속에서 그윽한 고요로 때론 자비와 용서의 마음처럼 침묵하는가 보다. 나 또한 시끄럽던 심사도 시간의 흐름에 모든 것을 풀어내며 미움도 증오도 망각이란 세월 속에 묻고 지나가리라. 지나간 세월은 또 한 장의 추억으로 남고 시간의 분주함에 발맞추어 나는 또 그렇게 살아가겠지.

순백의 춘설을 덮고 침묵하며 있는 산도 이제 서서히 더워지는 태양의 부드러움 속에서 녹아들 것이다. 그리고 그 눈이 녹아든 그 자리에서 엄동설한을 견디어온 새로운 생명들이 파릇한 고개를 내밀리라. 홀로 걸으며 느끼는 절절한 그리움과 삶의 열정은 용서와 배려의 마음으로 되살아나 안온한 삶으로 승화됨과 같이.

어느덧 달아오른 한낮의 태양에 마음을 녹이며 춘설에 마음 한 자락 기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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