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향의 깃발 아래서
이상향의 깃발 아래서
  • 반영호 <시인>
  • 승인 2011.03.01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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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반영호 <시인>

봄볕이 따스한 날이다. 늘어진 수양버들이 더욱 가지를 축 늘어트리고 죽은 듯이 서 있고, 수면은 거울처럼 판하니 매끈하다. 요즘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인데 비육우가 아닌 일소인 듯 보이는 늙은 소가 언덕 위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질겅질겅 되새김질을 하고 있는,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여유로운 풍경이다.

온 생물들이 미동조차 보이지 않으니 내 마음도 느긋해지는 것은 바람이 불지 않는 탓이다. 이래서 봄에 춘곤증이 찾아오는 모양이다.

이런 날은 깃발조차 늘어진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기만 하다. 바람이 불면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태풍이라도 몰아치면 성난 투우와 같아진다. 마구 흔들리는 소리 없는 아우성. 도달할 수 없어서 끝없이 동경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깃발은 집단이나 국가의 상징이며 이념의 푯대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경건해 진다. 숙연히 우러러보고 동경하며 예를 갖추게 된다.

깃발은 펄럭이는 천의 조각이며, 흔히 신호나 정체를 보여 주기 위해 상징적으로 사용된다. 최초의 깃발은 전쟁터의 군대를 보조하는 데에 사용되었으며, 초보 수준의 신호체제에 불과하였다.

벌써 35년 전이다. 군대생활을 DMZ에서 했다.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다. 반세기 동안 철문으로 굳게 닫혀 금단의 땅이 된 그곳에는 희귀 동식물이 살고 있다. 그들만의 자유로운 영역을 만들면서 엄청난 번식력으로 생태계를 풍요롭게 만들고 있는 곳이다.

부대 인근에 대성동 마을이 있다. '남북 비무장지대에 각각 1곳씩 마을을 둔다'는 정전협정 규정에 따라 남쪽에는 대성동 자유의 마을을, 북쪽에는 기정동 마을로 일명 평화촌이 조성됐다.

그런데 대성동 마을에 유독 눈에 뜨이는 게 있다. 대성동 마을의 국기게양대는 높이 99.8m로 국내에서 가장 높다. 태극기도 가로 18m, 세로 12m로 마을 어디에서나 한눈에 보인다.

북쪽 저편 2.4 떨어진 곳에 북한의 선전마을 기정동 마을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펼쳐져 있는데 대성동 마을에서 가장 근거리에 있는 북한 초소와는 불과 200여m다. 기정동 마을에도 대형 인공기가 나부낀다. 높이 158m 세계에서 제일 높은 게양대이다. 태극기에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더 크다.

반세기 이상 대결 구도를 이어온 남북 분단의 상징인 이들 두 마을을 번갈아 보면, 어느덧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의 현장'에 서 있음을 깨닫게 한다.

깃발은 비가 오는 날 늘어진다. 있는 듯 없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 숙연해진다. 그러다가도 비바람이 몰아치면 마치 대항이라도 하듯 세차게 펄럭인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몸부림과도 같다. 깃발은 정의로움이다. 양순한 것에는 다소곳하지만 거칠고 강한 것에는 더욱 기운차게 맞서는 역동적인 기백이다.

마치 모순형 역설이지만 깃발은 순정과 애수가 깃들여 있고,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의 비탄이 서려 있다. 이렇게 동경과 좌절 때문에 깃발의 비애는 동경과 좌절의 양면을 갖고 있다.

내 마음 속에도 깃발과 같은 역동적 모순형 역설이 내재해 있음을 언뜻언뜻 느끼며 가슴 서늘해 한다. 약한 것에 양순하고 강한 것에 더 강해지는 깃발 같은 성격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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