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주년 3·1절을 맞이하여
제92주년 3·1절을 맞이하여
  • 정하택 <충주보훈지청 과장>
  • 승인 2011.02.27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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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정하택 <충주보훈지청 과장>

2011년 3월 1일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92주년이 되는 날이다.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세계만방에 천명한 선열들의 불굴의 자주독립 정신은 우리 민족의 민족혼으로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비록 국제정세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호시탐탐 노리던 주변열강의 먹이로, 나라 잃은 백성으로 망국의 한을 천추에 묻고 식민지의 노예로 전락했지만 2천만 민중들은 하나같이 선봉에 나서 대동단결해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고 자주독립국가의 국민으로 살고자 했던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비폭력 평화운동의 자랑스러운 유산을 갖고 있다.

이렇게 애국선열들이 심장에 끓는 피가 식을 때까지 지켜온 나라이기에 긴 세월이 흘러 당시 몸소 3·1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던 애국선열들은 이제 작고하셨지만 이 땅에 삶의 둥지를 튼 우리는 3·1독립정신인 자주·자강과 화합·평화의 정신을 계승·발전시켜야 할 당연한 의무를 지고 있음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되겠다.

박은식이 저술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연 1542회의 집회와 연인원 202만9848명이 참가했던 3·1독립만세운동은 4만7306명이 투옥되고 7509명이 순국했으며 1만5850명이 부상당한 채 비록 실패했지만 민족사에 있어 자주독립의식과 민족적 결속을 일제와 세계에 과시하기에 충분한 일대 장거였다.

우리 충북지방의 3·1독립만세운동을 살펴보면 전래적으로 전통 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충효정신, 종교와 신교육을 통한 민족의식의 배태와 식민지 통치에 대한 대항의식, 그리고 당시의 국내외적 상황 등이 배경이 됐다. 우리지역의 만세운동은 전국에서 가장 늦은 3월 19일의 괴산읍 시위로부터 본격화돼 4월말까지 지속됐다. 이처럼 만세시위가 늦게 시작된 까닭은 교통의 불편, 종교조직의 미약, 중앙지도체계와 연락 차단, 학생층의 역량 미성숙 등이 요인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조선군참모본부의 비밀문서는 충청지역을 경기지역 다음의 위험지역으로 간주할 정도로 시위는 격렬히 전개됐다.

일제의 조선소요사건경위개람표에 의하면 충청지방에서 전개된 총 92회 만세시위 중 55%인 51회가 폭력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전국 평균치 37%를 상회하는 것으로 운동양상의 격렬성을 보여준다. 실제 충북의 경우 시위군중들이 경찰관서 13, 헌병대 3, 군청과 면사무소 7, 우편소 1개소 등 26개소를 습격·파괴·방화했고, 충북지방의 시위는 44회로 2만5750명이 참여했으며 사망 99명, 부상 210명, 체포 157명의 희생자가 발생해 전국에서 평안·경기지역 다음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특히 우리지청 관내에 충북 북부지방 최초 기미 3·1독립만세운동으로 괴산읍 만세운동을 비롯해 괴산군 청안·청천·소수·연풍·장연·칠성·도안면 독립만세운동과 음성군 음성읍장터, 소이면 한내장터·대소·삼성·감곡·금왕·맹동·원남면 만세운동, 충주시 신니면 용원장터 만세운동, 제천군 제천읍내·송학면 기미독립만세운동, 단양군 대강면 횃불만세운동 등 여러 곳에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퍼져나갔던 민족자존의 역사를 우리고장 지역민들이 지켜야 할 역사가 있다.

북한의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 3차 핵실험준비와 이집트를 비롯한 중동의 민주화열기로 나라 안팎이 격랑으로 요동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선열들의 독립정신을 우리가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지 돌아보면서 후손된 도리를 다 못하고 있음에 숙연한 마음과 함께 부끄러움이 앞선다. 92주년 3·1절을 맞아 선열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발전시켜 봄이 오는 길목에서 활짝 꽃망울을 터뜨리는 자연의 화사함처럼 독립만세운동이 보여준 민족적 역동성을 국민역량을 결집시키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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