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발자취를 찾아서 <21>
기독교 발자취를 찾아서 <21>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5.17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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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복음 씨앗 뿌려 일군 믿음의 밭
   
▲ 100년 역사의 새로운 비젼을 향해 힘차게 도약하고 있는 화당교회 전경.
“농촌교회가 지역과 사랑이 필요한 곳에 관심을 갖고 ‘사랑의 나눔’에 동참한다면 이는 곧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청주시내를 벗어나 효촌삼거리에서 문의방면으로 조금 달리다보면 화당삼거리 이정표가 보이고 화당교회 뾰족 종탑이 한눈에 들어온다.

언뜻 보기에 어느 전원주택 앞마당쯤으로 보이는 교회마당은 잘 다듬어 놓은 나무들과 마당을 가득 메운 잔디 사이로 5월의 푸르름이 넘실대고 있다.

대부분 교회들이 심각한 주차난으로 인해 공터마다 빼곡하게 그어져있는 주차선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은총의 하나님 세상을 변화시키소서”를 교회비전으로 두고 있는 한국기독교 장로회 화당교회(담임목사 백성호)는 청주제일교회 정순애 집사가 친가에 예수를 증거하면서 시작되었다.

화당리에 친가를 둔 정순애 집사는 출가 후 시댁에서 예수를 믿고, 1927년 친가를 방문해 이웃 부녀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초창기 정순애 집사의 전도를 받은 이마을 부녀들은 청주제일교회로 출석하며 신앙을 키웠다.

2년 후인 1929년 영애, 이진산이 본동으로 출가해 오면서 몇몇 여신도들을 자기집에 모아놓고 기도회를 인도하기 시작하면서 20여명의 부녀들이 모이게 되었다.

가끔 미국인 선교사, 청주제일교회 남승갑, 김순례 등이 번갈아 이 마을 예배처소를 방문해 예배를 인도해 나갔다.

1931년 4월 10일 화당리 말바위 야트막한 언덕에 살림집 3칸을 당시 80원에 매입해 1944년까지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1944년 일제의 계속되는 탄압으로 교회는 문을 닫고, 교회의 중추적 역활을 해 오던 이진산 집사마저 청주로 이사함으로 교회터를 90원에 매각하고 대금은 노회에 회수시켰다.

예배처소를 잃은 마을 6, 7명의 여신도회원들은 마을 박정님씨 집에모여 예배를 보았다.

1945년 8·15광복과 더불어 1946년 10월부터는 정의영씨 집에 예배처소를 정했다.

1947년 3월부터 김만학 장로가 문의 교회와함께 화당교회를 담임 시무하면서 제1대 당회장 김진영 목사가 이 교회 초대교인 정의영, 김한나를 서리집사로 임명했다.

1948년 5월 충북노회에 교회복구 보조비 1만원과 몇몇 교인들의 열성으로 장 21척, 광 14척 초가 예배당을 신축하고 제2대 당회장 오병수 목사가 순회 시무하며 1949년 5월 교회 신축 예배를 보았다.

1950년 2월 다시 기존 예배당을 헐어 마을 음지 돌방칸 터(장현태 씨 대지 벼 1말, 이도근씨 대지 6평을 벼 2말)로 예배당을 옮겼다.

그러나 1950년 다시 한국전쟁으로 인해 모든 교인들은 피란을 떠나고 1년 동안 교회는 예배를 보지 못했으나 1951년 7월 25일 김영로 목사가 순회하며 공동회의를 열고 정의영 집사가 장로로 임명 되면서 교회는 다시 활기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57년 7월 심한 장마로 인해 교회가 붕괴됐다.

교인들은 즉시 교회내 건축위원회를 구성하고 같은해 10월 총 공사비 32만1500원을 들여 교회를 준공했다.

그후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화당교회는 교회신축을 계획하고 대지를 구입 하는 등 다각적인 활동을 펼쳐 1977년 3월 13일 교회이전 신축 기공식과 더불어 1978년 5월 5일 교회 헌당식을 가졌다.

1985년 운곡 김동연 선생의 ‘화당교회’ 글씨를 받아 교회내 조경사업 준공식과 더불어 ‘화당교회’기념비를 세웠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외적인 것 보다는 내적인 부분으로 예수님의 뜻을 닮아가고 본받는 삶이였으면 합니다.

”영성사역에 대해 백 목사는 “봄부터 여름까지 온갖 비·바람을 견뎌냈을 때 좋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농촌교회도 지역 주민들을 위해 사역을 펼치고, 한발 다가가 소망과 비전을 심어주었을 때 그들도 한발 다가올 것이다”며, “한국사회가 근대화 될 때 교회가 신지식, 정신계몽 등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컸던 만큼 21세기 온갖 지식, 과학 문화가 난무하는 지금 사회가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도 오랜세월을 함께 해온 이웃으로 봐 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1931년 4월 10일을 창립일로 잡고 있는 화당교회는 말바위마을 작은초가에서 출발해 지금까지 지역주민 누구나 와서 휴식과 안식을 얻고 삶에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는 공동체가 되기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화당교회는 지역사회 속으로 다가가기 위해 지역복지목회를 지향한다.

지역주민들의 연령층이 높은 편이기 때문에 특별히 노인복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백 목사는 여건이 된다면 불우 청소년들에게도 관심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모이는 인원 80여명으로 소박하고 가족적인 교회 화당교회는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교회상을 제정하고 지역사회와 분리된 교회가 아니라 함께 할 수 있는 모범적인 교회로 발돋움하고 있다.

농촌교회는 지역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백 목사는 청주·청원 통합이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머지않아 화당교회가 지역내 전원교회로 우뚝서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은총의 하나님 세상을 변화시키소서” 지난 70여년 역사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의미를 전하는 화당교회는 100년 역사의 새로운 비젼을 향해 힘차게 도약하고 있다.

/신준수 객원기자lovemunhak@cc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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