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47>
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47>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5.16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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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세월 견딘 자애로운 미륵의 미소

< 130호 석굴의 거대한 부처상 뒷면 광배 벽화와 짚 위에 진흙을 발라서 만든 가사장삼의 주름은 매우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게 표현.148호 석굴에는 오른손을 팔베개하고 누워있는 20m의 와불상(705-780)이 있다.
와불상 뒤에 부처님의 제자들이 서 있으며 어두운 동굴벽면에는 현란한 채색벽화가 그려져 있다. >


▲ 중국 간쑤성 둔황현 남동쪽 20km 지점에 있는 불교유적인 둔황석굴 장경동 진열관에서 나와 3층으로 올라갔다. 1500년쯤의 북위(北魏)시대 석가모니불을 모신 259호 석굴로 간다라 주름양식이 돋보이고 벽면에 미륵보살조각상이 배치되어 있다. 237호 석굴에서는 파란 옷에 깃털모자를 쓴 통일신라 시대의 왕자모습이라고 가이드가 힘주어 설명하는 벽화를 바라보면서 신라 시대의 궁중의복 양식을 조금이나마 엿볼수 있었다. 이 석굴에는 당나라 중기 화풍의 관세음보살과 문수보살, 보현보살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얼굴이 긴 것이 특징이다. 특히 벽면에 갈색 비파를 연주하는 보살의 불화가 매우 인상적이다. 96호 석굴을 들어갔을 때 느끼는 경외감이나 위압감은 둔황 석굴의 백미를 이룬다. 33m의 미륵불좌상고(彌勒佛座像高)는 뭐카오쿠에서는 가장 큰 소상이다.이 북대 불전(618∼705)은 측전무후가 권력탈취 기념으로 세운 것이라고 하는데 여성이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불교의 힘을 빌어 자신이 미륵의 재림이라 하여 그 증거로써 세운 것이라는 말이 전해진다. 9층 누각에서 대불의 얼굴을 보려면 누각 위로 올라가 보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발등이 사람 크기 두 배나 되는 이 거대 미륵상을 아래에서 내려 보노라면 따뜻함이나 평화로움보다는 오히려 위압감이나 인간의 왜소함을 느끼게 만든다.송나라 때 만든 비천상이 벽면에 두어 개 잔해로 남아 있다. 천년이 지나도 윤곽이 선명한 채색화는 자연 염료 물감의 뛰어남을 느낄 수 있게 한다. 1100년 된 당나라 시대의 목조건물 한 채가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 130호 석굴의 거대한 부처상 뒷면 광배 벽화와 짚 위에 진흙을 발라서 만든 가사장삼의 주름은 매우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는 표현기법으로 느껴졌다. 입구에 있던 벽화가 문화혁명 시절에 칼질로 훼손된 것을 보면서 뭐카오쿠가 이만큼이라도 보존될 수 있었던 것도 부처님의 가호가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148호 석굴에는 오른손을 팔베개하고 누워있는 20m의 와불상(705∼780)이 있다. 와불상 뒤에 부처님의 제자들이 서 있으며, 어두운 동굴벽면에는 현란한 채색벽화가 그려져 있다.뭐카오쿠 석굴은 개방이 되는 굴이 한정되어 있고 특별히 더 방문하고 싶은 사람은 추가로 돈을 내야한다. 2000점이 넘는 채색소조상(彩色塑造像)과 총 4만 5000㎡ 면적에 그려진 벽화들은 비단길의 문화와 불교 문화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각 석굴을 다 감상하고 음미하기에는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를 만큼 방대하고 그 규모 또한 거대하였다. 만리장성을 쌓는 민족답게 장구한 세월을 인내하며 불상을 조각하고 그림을 그렸던 옛 사람들의 간절한 종교적 신념과 소망이 굴 안 가득히 스며 있다. 인간은 왜 저 거대한 불상을 만들어 신봉하고 기원하며 자신의 안녕과 국가의평안을 빌었을까. 부처님은 정녕 자신을 형상화한 일체의 상(像)들을 원했던 것이었을까. 나약한 인간의 간절한 염원을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맛보게 된다.초기 불교 회화에서 부처의 모습은 상징적으로 표현되었다. 순수의 상징인 연꽃이나 해탈의 상징인 보리수, 인간 세상에 남긴 부처의 발자취를 의미하는 발자국 등이 그러한 상징들의 일부였다.자신에 대해 어떠한 형상도 만들지 말라던 부처의 뜻과는 달리 훗날 대승불교의 영향으로 부처는 신으로 형상화되었다. 인도 최초의 통일국가인 마우리아 왕조의 3대 아소카 왕(재위 BC 268-232)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으면서 불교가 간다라 지방으로 퍼져나갔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으로 간다라 불교미술은 점차 헬레니즘 미술의 영향을 받아 이른바 간다라 미술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40년쯤에 건국된 쿠샨 왕조는 페사와르를 수도로 하고 전성기인 3대왕 카니슈카(128 혹은 144년에 즉위) 치세에는 그 판도가 동·서 투르키스탄과 아프카니스탄, 북인도 대부분을 포괄하였으며, 불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권장하였다. 그리하여 헬레니즘 미술과 불교미술이 융합된 독특한 간다라 미술이 정형화(定型化)되기에 이르렀다.간다라 지방의 가장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불상(佛像)의 제작이다. 불상의 전파는 곧 불교의 전파를 의미하는 것으로 불상은 간다라로부터 서역을 거쳐 중국이나 한국, 일본 그리고 남해를 거쳐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 전파되었다. 간다라 미술의 유품은 페샤와르 근교의 불교유적지와 펀자프의 탁실라, 아프카니스탄의 핫다(Hadda) 등지에서 다수 발견되고 있다. 오아시스로를 통해 인도로 떠난 구법승들은 예외 없이 간다라 유지를 순방하였다.특히 조형예술의 그리스적 색채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로 전해졌고, 초기 불교 회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부처는 서서히 아시아 각국 사람들의 얼굴 특색을 띠어 갔고, 마침내 아시아에서 하나의 공통된 얼굴이 생겨나게 되었다.대승불교의 경전에서는 부처의 초상을 그리고 불상을 만드는 작업을 공덕을 쌓는 일로 높이 치고 있다. 부처의 그림을 그리는 일은 참된 마음으로 부처님 전에 재물을 바치는 것과 생명체를 부처의 품으로 이끄는 것, 그리고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과 함께 불성에 이르는 4가지 수단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인도 불교의 영향으로 중국에서도 거대한 조형예술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 있거나 누워 있는 부처의 모습을 거대한 바위벽에 새기는 것은 곧 석가모니 부처를 초월적인 존재로 만드는 노력의 일환이었다.중국인들은 불교의 파라다이스로 서방정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현장이나 혜초스님이 서쪽으로 구도 여행을 떠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서역은 거의 불교의 고향과 같은 의미를 띠고 있다. 수 왕조 이후 불교는 국교수준으로 발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 왕조 시대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처럼 불교의 찬란한 융성과 함께 중국에서는 인도의 영향을 벗어나 중국적 색채를 띤 새로운 선불교가 태동하였고, 점차 중국 문화권 내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 둔황의 메마른 하천.

1000년에 걸쳐 둔황을 오가던 사람들의 불심을 담아 조성한 뭐카오카 석굴을 바라보면서 한 동안 할 말을 잃었다.

거친 석벽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은 영원한 세계를 향한 인간의 믿음과 신념 때문이 아닐까. 짧은 시간에 그들이 남겨 놓은 문화유산과 역사의 체취를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내 안에 소리 없이 다가오는 역사의 무게가 잔물결처럼 가슴을 울리고 있다.

/시인·극동정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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