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과 제자의 인연
스승과 제자의 인연
  • 충청타임즈
  • 승인 2010.10.20 22: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청논단
오창근 칼럼니스트

중학교 시절 사회를 담당하는 선생님께서 첫 수업을 시작하며 던진 질문이 생각난다. 마른 체격에 금테 안경을 손으로 올리며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인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한참을 머뭇거리던 우리는 중구난방으로 생각나는 여러 답을 외쳤다. 그중 대다수 학생은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이라는 대답을 가장 많이 했고, 그다음이 부부간의 인연이라고 답을 했다. 그러나 선생님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가장 깊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하는 궁금증을 갖고 있다가 어느 날 자료를 찾아보았다.

화엄경(華嚴經)에 보면, 한 국토에 같이 태어난 인연은 일천 겁의 인연이요. 하루 동안 동행한 인연은 이천 겁의 인연이요. 한 마을의 이웃사촌은 사천 겁의 인연이요. 남녀가 하룻밤을 동침한 인연은 육천 겁의 인연이요. 가장 가까운 친구는 칠천 겁의 인연이요. 부부의 인연은 팔천 겁의 인연이요. 형제자매의 인연은 구천 겁의 인연이요. 부모 자식은 일만 겁의 인연이요. 불법문중에서 스승과 제자의 인연은 십일만 겁의 인연이다. 라고 나와 있다.

겁(劫)이라는 단위는 하늘과 땅이 한 번 개벽한 때에서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시간을 뜻한다. 무한의 세계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전생의 가장 깊은 인연의 결과로 본 것일까 육신을 낳아 준 것이 부모지만, 생각의 그릇을 키우고 가치관과 세계관을 키워 정신적인 탄생을 도와준 이유가 아닐까 하며 나름의 답을 찾아보았다.

사람은 성인이 되기까지 많은 스승을 만난다. 오래 기억되는 스승도 있고,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리고 싶은 사람도 있다. 인격이 성숙한 스승은 제자의 허물을 덮어 주고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주며 작은 잘못을 책망치 않고 본인 스스로 바른길을 보여 준다. 마치 오디세우스(Odysseus) 왕이 친구인 멘토에게 아들 테레마쿠스의 교육을 부탁했을 때 멘토는 테레마쿠스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산책도 하고 토론을 통해 지도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논리적 사고와 합리적 판단력을 길러준 것처럼 허물없이 대해 주며 인성의 완성을 도왔다.

요즘은 "교사는 많으나 스승은 적다."라는 말을 많이 한다. 교권이 바닥에 떨어졌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스승을 공경하지 않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는 학생도 많다. 고 한다.

때론 차마 입에 담기 싫은 성 추문도 종종 기사화되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일도 있다. 제자와 여교사의 추문이 신문을 도배하고 여교사의 신상정보를 무분별하게 공개해 인격적 살인을 저지르는 네티즌들의 경솔함으로 인터넷 여론이 들끓고 있는 현실에서 스승과 제자의 도리와 참된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찬찬히 돌아다 볼 때가 되었다.

학생을 가르친다고 모두가 스승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스승이라고 해서 모두 완벽한 인격을 갖춘 것도 아니다. 수만 명의 스승 중에 잘못된 선택을 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한 사람의 비도덕적 행위로 열정을 갖고 학생을 가르치는 많은 스승을 호도해서도 안 된다. 어느 시대나 그런 사람은 늘 있었다. 스승의 참된 가르침은 몸으로 보이고 행동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어린 학생들 눈에도 참과 거짓은 확연히 드러나는 법이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가 임종을 앞두고 침상 곁에 모인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펴보이며 "시경에 나오는 말처럼 전전긍긍하며 마치 얼음 위를 걷듯 조심스럽게 살아 부모에게 받은 몸을 온전히 지켜 이제는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 불효를 면하게 되었구나!" 하며 효의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몸소 보이는 장면이 나온다.

체험을 통한 가르침과 임종의 마지막 순간에도 제자들에게 깨우침을 주려는 모습은 스승이 어떻게 살고 죽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 준다. 이런 스승이 있어 숙연(宿緣)이 가장 깊어야 스승과 제자로 만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