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속의 날씨-18회
신화속의 날씨-18회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5.05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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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계 어느 나라 어느 지역이나 홍수신화가 없는 곳은 없다.

성경에서의 노아의 홍수, 그리스 신화에서 데우칼리온과 퓌라의 이야기,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홍수신화, 중국 우임금의 홍수설화 등이 대표적이다.

과학자들은 지층과 기후학적 조사를 통해 기원전 2300년쯤의 세계적인 대홍수가 실제로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구전(口傳)으로 전해지던 고대인들의 홍수참변 경험은 지역과 민족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구성되어 전해졌다.

우리 민족에게도 몇 개의 홍수신화가 전해져 온다.

홍수에 살아남은 남매가 결혼해서 자손을 낳았다는 고리봉 전설과 대홍수 이후에 목신(木神)의 아들 나무도령이 새 인류를 낳았다는 등의 설화가 있는데, 가장 흥미 있는 홍수 이야기로 백두산 홍수신화를 들 수 있다.

엄청난 비가 석 달 열흘간 쏟아져 내렸다.

쉴 새 없는 장대비에 붉은 번개가 땅을 후려쳤다.

온 땅에 넘치는 물은 집과 농토와 사람들을 모두 삼켜버렸다.

이 때 우리나라에는 백두산에 살고 있던 모자(母子)만이 간신히 살아남았다.

사방천지를 바다로 만든 홍수는 점차 백두산 꼭대기까지 차오르기 시작했다.

홍수 이후 양식을 구하지 못해 멀건 죽으로 자식을 먹이던 어머니는 굶주림으로 곧 죽을 지경이 되자 하늘 신에게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하늘을 기워 인간의 운명을 구해주신 여와 신이여, 지금 세상에 홍수가 나서 세상만물이 멸종되고 있사옵니다.

천만다행으로 우리 모자만 남았으나 살아갈 길이 없사옵니다.

제가 죽는 것은 여한이 없으나 귀한 유복자가 죽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집니다.

부디 유복자를 살려 주신다면 구천에 가서라도 그 은혜를 갚겠습니다.

” 기도를 마친 유복자의 어머니는 배고픔으로 끝내 죽고 말았다.

기도에 나오는 것처럼 여와는 다섯 빛깔의 돌을 골고루 섞고 짓이겨 하늘에 뚫린 비 구멍을 막아 대홍수를 막은 신이다.

하늘의 여와 신은 백두산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지금 한반도에 홍수가 나서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이 죽었다.

백두산의 유복자 하나만이 겨우 살아남았는데, 어찌하면 이 아이를 구해낼 수 있겠느냐?” “할머니, 제가 다녀올게요. 백두산의 홍수도 막고 어린 아이도 살려보겠습니다.

” 여와는 증손녀를 땅으로 내려 보냈다.

한반도에 내려온 여와 신 증손녀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홍수의 망망대해 뿐이었다.

백두산 꼭대기만 겨우 드러나 있었다.

그녀는 먼저 유복자를 찾아내 하늘의 감로수를 먹여 살려낸 다음 홍수를 막을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증조할머니께서도 돌을 이용해 하늘의 뚫린 구멍을 막았으니, 나도 돌로 백두산 홍수를 막아야겠다.

” 그녀는 백두산의 바윗돌을 뽑아내 3일 동안 밤낮으로 갈아 가느다란 돌 바늘을 만들었다.

그다음 백두산 꼭대기에 있던 커다란 바윗돌을 천지의 물이 넘치는 곳에다 쌓아놓고 돌 바늘로 바느질을 하기 시작했다.

온 사방으로 넘쳐나던 물이 촘촘한 바느질에 막히면서 터놓은 한 곳으로만 흐르게 되었다.

홍수가 잡히면서 백두산의 웅장한 모습이 물 위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손녀야, 참으로 장하구나. 어찌 돌 바늘을 이용해 홍수를 다스릴 생각을 해 냈단 말이냐. 기왕에 네가 백두산 홍수를 막아내고 어린 생명도 살려냈으니 땅에 내려가 홀로 남은 아이를 키운 다음 그와 혼인하여 세상을 번성시키도록 하여라.”여와 신의 뜻에 따라 증손녀는 백두산으로 내려와 어린 아이를 키우기 시작했다.

아이가 자라서 늠름한 사내가 되자 혼인을 하여 세상에 자손을 퍼트렸다.

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자손들이 다시 땅에 번성하기 시작했다.

증손녀가 홍수를 막을 때 기워놓은 바윗돌이 백두산 천지 주변의 16개 봉우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때 틔워놓은 물길은 승차하로 되었고, 돌로 만든 바늘은 물 길 입구에 널려있는 바위무지라고 전해진다.

바위를 연결해 천지를 기웠다는 돌 바늘 이야기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우리네 조상들만의 창조적 상상력이라고 하겠다.

백두산은 장백산맥 줄기에 있는 한민족의 영산(靈山)이다.

기상학적으로 한반도에 큰 비가 내릴 조건은 장마전선과 연결된 강한 남서풍이 불어올 때인데, 이 비바람은 백두산과 부딪치면서 큰 비를 만들어낸다.

백두산의 지형적인 영향으로 강수량 증가의 시너지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비가 내리면 주변보다 큰물이 백두산으로부터 흘러내리는 현상이 백두산 홍수신화의 근간이 되었을 것이다.

홍수신화는 세계와 인간의 재탄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늘이 내리는 대홍수는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한 징벌과 물 씻음을 통한 갱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서양 홍수신화의 대부분이 신들의 분노로 생기고 이때 몇 사람이 간신히 구원받는다는 도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동양의 홍수 신화에서는 신들이 홍수를 적극적으로 막는다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재해에 대해 하늘의 뜻만을 기다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라는 인간의 의지를 신화에 반영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화는 고대 인간의 경험과 상상력이 빚어낸 허구의 이야기이면서도 현세와 미래의 가치를 제시해 주는 정신의 이음줄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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