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추억함
추석을 추억함
  • 충청타임즈
  • 승인 2010.09.16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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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규호 <문화콘텐츠 플래너>

아버지는 항상 분주하셨다.

시장통 한복판에서 늘 추석을 맞아야 했던 내 어린 시절. 명절대목이라는 특수로 넘쳐났던 사람들과, 늦은 밤이 돼서야 파시(波市)가 되는 바람에 쉴 대로 쉬어버린 목청만큼이나 지친 몸은 자꾸만 허방다리를 놓고 말았다.

한가위를 코앞에 둔 채 휘영청 밝은 큰 달의 빛은 차라리 서러웠던 것이 내 어릴 적 추석의 기억이다.

그리고 잔뜩 모자란 잠 때문에 천근만근 같았던 눈꺼풀이, 그리고 잠투정을 들쳐 깨우는 아버지의 성난 목소리가 야속하기만 했던 추석날 새벽.

아버지는 자식들을 모조리 이끌고 새벽기차를 탔다.

막내이던 아버지는 고향인 지금의 충주시 주덕읍으로 동이 트는 것과 거의 동시에 큰집으로 내달려 가시곤 했다.

부대종이에 둘둘 말아 싼 쇠고기덩어리를 내 손에 들려주시며 놓치지 말라고 당부에 당부를 거듭하시던 아버지의 뜻을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엿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아버지는 추석 대목장을 돕느라 밤 늦도록 파김치가 되어버린 어린 자식 5남매를 추석이면 왜 어김없이 모조리 이끌고 하염없이 고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는지 그때 어찌 헤아릴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새벽 첫 기차를 타는 사람들은 어찌 피난민 행렬처럼 길게 늘어서고 있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는 지혜는 그때 내겐 아직 없었다.

그땐 그랬다. 삼대가 모여 함께 차례를 지내면서 큰 방 맨 끄트머리에서 사촌형들의 엉덩이에 대고 절하느라 키득거리다가 어른들의 서늘한 눈초리에 몸을 움찔하던 기억.

그 시절 추석에는 차례를 마치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 자리에서 어김없이 또 하나의 통과의례가 있었다.

오랫동안 소식을 알 수 없던 자식들에 대한 걱정이 이어지면 소학교라도 마쳐 요즘 말로 가방끈이 그나마 길었던 아버지의 훈계 또는 징치가 있었고, 회초리라도 들리는 날에는 앞문으로 뒷문으로 달아나던 사촌형들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추석은 그랬다. 수고에 감사하고 잘잘못을 가려 새롭게 반성하는 계기였으며, 서로 용서와 화합을 통해 거듭나는 시간이었다.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는 '망각뿐인 용서'를 경계하고 카뮈는 용서를 위한 철저한 기억을 주문한다.

그런 용서와 화합, 그리고 길고도 길었던 한여름의 수고를 솔잎 내음 그윽한 송편을 한 입 베어 물며 위로했던 일. 마을 뒷동산에 오르면 금방이라도 손이 닿을 것 같은 둥근 달을 보며, 그리고 아직 풍성한 가을 들녘을 보며 다시 희망을 채우는 일은 아무래도 추석이기에 가능한 넉넉함이 아니었을까.

세월이 흐르고 흘러 아버지를 여의고 이제 나는 더 이상 추석에 차례를 지내기 위해 아버지의 고향을 가지 않는다.

아니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현대인들이 농촌의 풋풋함과 훈훈함으로 기억되는 추석의 넉넉함은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역시 분주한 일상 가운데 하나로 그저 습관적인 귀향길에 나서고 만다.

성냥갑 같은 사각 틀의 아파트에 갇혀 살며, 또 그 아파트를 내 집으로 만들겠다는 투지를 불태우며 아등바등 사는 사이 추석은 이미 추억으로만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대가족과 농경사회라는 생존 수단이 공업과 지식정보서비스 산업의 시대로 완전히 뒤바뀐 지금, 우리는 어쩌면 내 부모형제보다 직장상사나 거래처에 더 목을 매고 살아야 하는 서글픈 처지가 아닌가.

게다가 물가는 어찌나 천정부지로 올랐는지... 벌이가 변변치 않은 내 눈치를 살피며 아내는 자꾸만 제수용품 흥정을 들었다 놓았다 한숨인데, 상인의 눈초리는 사납기만 하고...

어쩌랴. 이번 추석은 그런 저런 가난함 마음으로 두루두루 용서를 구하기만 하면서, 나 역시 어린 덧?을 깨우느라 추석날 새벽잠을 설치면서 추억으로만 침잠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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