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저씨'의 사회학
영화 '아저씨'의 사회학
  • 충청타임즈
  • 승인 2010.09.10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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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규호 <문화콘텐츠 플래너>

잘 생긴 배우 원빈에 의한, 원빈을 위한 영화로 일컬어지는 '아저씨'가 5백만명의 관객을 넘어섰다.

중고신인 이정범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아저씨'의 성공적인 흥행은 잔혹한 싸움과 총칼 등 흉기가 난무하는 폭력성을 감안하면 당초 기대를 뛰어넘는 결과로 받아들여진다.

쉽게 소통하지 못하는 사회적 병리현상이 관객을 자극한 것인가. 영화 '아저씨'가 개봉 한 달을 넘기고도 꾸준하게 사람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이고 있음은 심상치 않다.

주인공인 아저씨 태식(원빈 분)은 세상과는 완벽하게 단절된 상태에서 낡고 어두침침한 전당포에서 무의미한 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적어도 불행의 그림자를 일찌감치 온몸에 달고 사는 소녀 소미(김새론 분)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몸 전체가 가공할 만한 살인병기인 전직 특수부대 요원 태식은 사랑하는 여인과 그 여인이 잉태한 소중한 생명으로 벅차기만 했던,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숨어 있는 권력에 의해 송두리째 빼앗긴 비극적 한을 가슴에 품고 있다.

폭력에 의해 처절하게 무너진 희망 앞에서 태식은 결국 철저하게 세상과의 소통을 차단한 채 고립되고 있는데….

그와 세상 사람이 만나는 유일한 통로는 소미라는 이름의 소녀. 그녀는 그를 아저씨라 부르면서 일방통행한다.

마약과 장기매매 등 극악한 폭력성은 범죄라는 이름의 잔인함으로 반인륜적이고 반사회적인 행태를 거침없이 일삼으며 대부분의 선량한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준다.

그런 잔인함은 결국 소미를 납치하게 되고 미혼모인 소미의 엄마를 살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은 채 장기를 떼어 내 팔아버리는 끔찍함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공권력은 어김없이 헛발질하며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주변을 기웃거리거나 변죽을 울리는 데 그치고 있으니, 이 사회의 안전망은 과연 기대할 만한 수준인가.

태식을 아저씨라 부르는 유일한 그의 친구 소미가 납치되고 자신마저 옥죄어 오는 범죄의 위협에서 결국 태식은 혼자 분연히 일어서며 과감하게 맞서는데, 이는 그나마 세상과의 문을 조금은 열어두며 소통이라는 희망을 놓치지 않으려 몸서리치는 현대인의 모습과 다름없다.

세상의 모든 범죄와 과오는 용서로 순치된다. 그러나 그 용서는 어쩌면 기억에서 지우고 싶다는 나약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당연한 이치를 이 영화 '아저씨'는 배우 원빈의 마음껏 폭발하는 폭력의 미학을 통해 응징이라는 이름으로 깨닫게 한다.

태식과 소미는 세대를 뛰어넘는 암묵적 교류와 서로에게 은근히 기댈 수밖에 없는 사회적 관계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니면서도 범죄자들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복수와 응징, 그리고 그런 폭력이 수반되는 친구 구하기에 용서는 전혀 설 자리가 없다.

태식이 비극적으로 잃어버린 사랑하는 여인과 그 여인이 잉태한 피붙이와의 이미지 중첩을 통해 소미를 애틋하게 여기는 상황을 유추할 수 있다는 인식은 가능하다.

그러나 단지 전당포에 가끔 들르는, 그리고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어린 계집아이를 위해 공권력도 가족도 아닌 그저 '아저씨'의 이름으로 사투를 벌이는 일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자행되는 극단적인 인간성의 처절한 표현으로 받아들임이 차라리 그럴 듯하다.

모르는 체해도 그만이고, 또 눈앞에서 목격하고도 외면하는 반사회적 행위에 대해 폭력적인 미학으로 포장된 한 영웅이 해결사로 등장하는 것은 여전히 낯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유일하게 접촉할 수 있는 소통의 매개를 빼앗아 가는 일은 어쩌면 지금 현대인들에게 가장 커다란 공포일 것이고, 그 막연한 두려움이 현대인에게 극장에서 '아저씨'를 찾게 되는 카타르시스일 수 있다. 그러니 소통은 우리에게 여전히 희망이고 그 희망을 막는 일은 반드시 응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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