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첸중가'의 신은 알고 있다
칸첸중가'의 신은 알고 있다
  • 충청타임즈
  • 승인 2010.09.08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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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오창근 <칼럼니스트>

"내가 정상에 오른 것을 칸첸중가의 신은 알고 있다. 그리고 난 신을 속이지 않았다."라고 항변하는 여 산악인과 정상에서 찍은 사진에 의혹을 제기하며 정상이 아닌 한참 아래에서 찍은 사진이라 정상등반의 증거물로는 부족하다는 한국산악연맹의 보도를 놓고 설전이 벌어지고 있다. 8000미터가 넘는 고봉을 목숨을 걸고 오른 사람들의 노력을 놓고 가까운 동네 야산이나 오르는 사람으로 딱히 할 말은 없으나 씁쓸함은 지울 수가 없다.

정상에 올랐다는 새로운 확실한 증거만 있으면 공방전은 사라질 것이고, 증거가 없다면 등반한 당사자의 양심만이 그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인간의 끊임없는 도전정신의 산물이 극지방 탐험과 히말라야 등반이다. 쉽게 허락되지 않은 자연환경 탓에 인간이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시험할 수 있는 좋은 무대다. 등반 과정 가운데 숱한 생명이 눈 속에서 주검으로 동면하고 있지만. 인간의 도전은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오른다는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다. 자신과의 싸움, 개인의 명예, 더 나아가서는 국가의 이미지 제고를 위해 그들은 죽음을 무릅쓴 고행을 자처한다.

탐험을 통한 인간의 의지를 시험하는 순수성만 있다면 이러한 이전투구의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몇 개의 봉우리를 오르고, 얼마의 시간이 소요되었느냐를 따지는 것은 등산을 스포츠로 인식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0.0001초의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첨단 과학이 동원되고 그 기록을 깨뜨려 가는 과정에 사람은 희열을 느낀다. 그러나 등산은 기록을 재는 스포츠가 아니다. 사투를 벌이고 정상에 우뚝 선 모습은 인간의 무한한 도전의식과 온갖 역경을 이겨낸 인간승리의 감동을 준다. 그러나 누가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이 올랐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신이 허락해야만 정상에 설 수 있다.'라는 말은 아무리 좋은 조건과 첨단 장비를 갖췄다 하더라도 자연 앞에선 인간은 작은 존재라는 겸손함을 내포하고 있다.

등반대를 인도하는 셰르파들은 무수한 산봉우리를 오른다. 무거운 짐을 지고 목숨을 담보로 산을 올라 정상을 밟지만, 그 영예는 늘 외국인에게 양보한다. 그들에게 정상을 몇 번 오르고, 몇 봉우리를 올랐느냐는 중요치 않다. 신이 허락하면 정상을 밟고 그렇지 않으면 내려오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산은 그들에게 경외의 대상이다. 깃발을 꽂고 증거물을 남기는 것들은 함께하는 등반대일 뿐이다. 거액의 스폰서를 받아 경쟁적으로 산을 오르는 산악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동상으로 다리를 잘라내거나 발가락과 손가락을 잃은 사람도 많다. 그리고 아직도 수습하지 못한 시신들은 눈 속에 파묻혀 미라가 된 채 방치되고 있다. 목숨을 걸어야 하기에 사람들은 히말라야에 매력을 느낀다.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 신의 노여움을 달래며 산을 오르지만, 산은 항상 그곳에 있다. 산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드는 것이다. 등산(登山)이 아니라 입산(入山)이다. 정상에 선다고 산이 내 소유물이 되지 않는다. 발자국 하나 남기고 돌아오는 과정일 뿐이다. 그래서 과욕은 늘 참사를 부른다. 불순한 일기에 오래도록 준비한 모든 것을 훌훌 털고 다음을 기약할 만한 그릇이 된 자만이 산에 올라야 한다. 산은 오르는 과정이지 정상을 밟고선 사진으로 명예를 증명할 순 없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한국 산악인의 명예는 국제적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순수성이 결여된 기업의 마케팅 과열이 부른 결과라고 입을 모은다. 여성 최초의 8000m급 14좌 등반이라는 쾌거가 진실 공방전으로 번진 모습을 보는 국민의 마음도 착잡하다. 어떤 결론이 나오든 이번 사건을 계기로 성급한 성과주의에 조급해 하는 우리의 모습을 반추하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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