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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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4.11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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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나절 동안에 선생님을 수십 번씩 찾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1학년 적응 과정 학습은 쉬이 허기지게 만든다.

하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참으로 해맑고 고운 꿈나무들이다.

여섯 학급뿐인 작은 시골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오후 시간에도 교사들은 분주하게 움직여야 한다.

오늘도 혼자 정신없이 교실 청소를 하고 있는데, 교실 뒷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온 한 남자 아이가 멋쩍은 듯이 웃으며,“1학년은 벌써 갔어요? 우리는 청소하고 가야 되는데….”하고는 묻지도 않은 말을 혼자 내뱉더니 책상 위에 얹어 놓은 의자를 주섬주섬 내린다.

2학년이 된 지 벌써 한달 이상이 지났건만 1학년 교실을 뱅뱅 돌고 있는 아이.스무 해 가까이 ‘선생님’이라는 이름은 나와 함께 했다.

이젠 길 가다가도 어디선가 ‘선생님’하고 부르면 어김없이 그 소리를 쫓아 고개를 돌리곤 한다.

이쯤 되면 흔한 말로 도가 텄을 법도 하건만, 해마다 3월이면 한바탕 가슴앓이를 겪는다.

지난해에 맡았던 아이들을 떠나보내면서 겪는 행사인데, 올해는 한달 이상이 지나도록 상처가 채 아물지 않고 있다.

몇 해 만에 1학년 담임을 하게 되어서 그런지 설렘과 기대와 다소의 걱정으로 맞았던 지난해 입학식 날, 범상치 않은 개구쟁이 두 명이 양대 산맥을 이루어 쌍으로 자신들이 오르기 험난한 산임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귀여운 녀석들. 기다려라. 선생님이 많이 사랑해 주마.’20여년을 걸어온 교사로서의 노련함과 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엄마라는 이름을 비장의 무기로 삼고 있었던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여유 있는 미소로 첫 만남을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하지만 그 자신만만함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었다.

두 아이 중에 한 명은 지난 한해 동안 나의 가슴을, 나의 이성을 철저하게 조롱했다.

분노와 슬픔을 동시에 가진 아이의 눈은 마음을 헤집어 놓았고, 억지와 심술궂은 행동은 내 인내심을 무너뜨렸다.

이제야 나와 마음이 하나가 되었나 싶어 내심 기뻐하고 있으면 어느새 처음 자리로 돌아가 버리는 아이의 행동은 나를 점점 지쳐가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 아이의 이유 있는 어긋난 행동들에 대한 나의 대처 방법에 교사의 억지스러운 고집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는 윽박지르는 내 꾸중에 눈물을 흘리면서 가차 없이 소리를 지르곤 했다.

“선생님은 알지도 못하면서 나만 미워해. 내 말은 들어주지도 않고.”내가 한 발 다가가면 마음을 열어주지도 않은 채 어김없이 한 발을 뒷걸음치는 아이의 상처받은 마음이 빨리 열리기를 기다리는 나의 마음은 조급하기만 했다.

둘 사이의 줄다리기는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우습게도 그 아이의 행동은 어느새 학교를 벗어난 내 생활 속에까지 들어와 있었다.

녀석 때문에 힘이 솟았고, 녀석 때문에 교사로서의 무능함에 좌절하기도 했고, 녀석 때문에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고, 녀석 때문에 실없이 웃는 날도 있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시골에 가면, 시할머니께서는 손쉽게 밥을 만들어내는 전기밥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장작불을 지펴 커다란 가마솥에 밥을 지어 주셨다.

그럴 때면, 아이들과 나는 할머니곁에 쪼그리고 앉아 구수한 장작불 냄새와 쌀이 익어가는 냄새를 맡으며 뜸이 들기만을 기다렸다.

집에서는 밥을 준비하는 짧은 시간도 기다리지 못해 군것질로 대신하곤 했던 아이들도 잘 참고 기다렸다.

밥을 다 푼 후에 긁어 주시는 쟁반만한 누룽지와 구수한 숭늉 때문이었다.

누룽지나 숭늉은 기다림의 미학이 빚어낸 지혜인 듯싶었다.

나는 이 아이로부터 누룽지와 숭늉 같은 기다림의 지혜를 배웠다.

한 발짝 앞서 실망하거나 지치거나 포기하려 했던 성급한 선생님의 곁을 떠나지 못한 채 마음을 열어준 이 작은 영혼이 나에게 깨달음이라는 귀한 선물을 주었던 것이다.

더 오래 기다려 주지 못했던 나의 어리석음과 미안한 마음에 한 달 이상 가슴이 아렸다.

그렇게 아이들은 늘 나를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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