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천 어제와 오늘<28>
무심천 어제와 오늘<28>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4.17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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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운천교와 용화사
요즘 무심천 양쪽 둑방에 벚꽃이 활짝펴 장관을 이루고 있다.

화창한 봄날씨에 많은 청주시민들이 벚꽃 구경을 하느라 양쪽 둑방이 크게 붐볐다.

올 무심천 벚꽃은 지난해보다는 4일정도 빠른 것 같다.

무심천 벚꽃은 동쪽으로는 금천동 효성병원앞에서부터 우암동 흥덕대교 아래까지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모충동에서 사직1동을 지나 운천동까지 이어져 해마다 4월이면 분홍빛벚꽃으로 장관을 이룬다.

그중에서도 청주대교에서 흥덕대교까지의 양쪽 동·서로에는 청주시민들이 많이 찾는 구간이라 벚꽃이 만개하는 휴일 저녁에는 인파가 많이 몰리고 차량이 몰려 교통혼잡을 빚기도 한다.

청주대교 아래는 롤러스케이트장이 있어 매일 저녁 롤러스케이트로 건강을 다지는 청소년과 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자전거도로와 조깅코스가 있어 시민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또 무심천에는 100m짜리 고사분수가 있어 큰행사때나 때때로 하늘높이 물을 뿜어 올려 시민들에게 볼거리를 주고있다.

70년대까지만해도 이곳 무심천은 무릎까지 차는 깊이의 맑고 깨끗한 물이 흘러 개구장이들의 물놀이 장소로 각광을 받았으며, 까치내를 거쳐 올라오는 물고기를 잡으려는 시민들이 낚싯대를 드리우는가 하면, 어항을 놓기도해 말그대로 청주시민들의 휴식처로 손색이 없었다.

종종 빨래하는 아낙네들의 재잘거림과 한여름 폭염을 식히려 멱감는 모습 등이 정겨운 풍경이었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도시가 팽창되고 각종 생활오수 등이 유입되는 것은 물론 수량마저 줄어들어 하천 수질이 급격히 나빠져 물색깔이 희뿌옇게 변하고 악취마저 나면서 물고기도 사라지고, 아이들 물장구는 물론 멱이나 빨래등을 할수 없는 죽은 하천으로 변해 어른들마저 찾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지금은 4∼10월까지 농촌공사가 대청댐 물을 무심천으로 방류, 깊이 40∼50㎝정도의 물이 흘러 하천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청주대교와 흥덕대교사이 무심천에는 동·서를 왕래하는 시민들이 많아 여러곳에 돌징검다리를 설치, 교통편의는 물론 정겨움을 주고 있다.

과거 충북선 청주역이 지금의 청주시청 자리에 있을 당시에는 현 청주대교 자리가 철교였고, 제1운천교는 돌징검다리 였었는데, 청주역이 현재의 청주MBC자리로 이전하면서 청주대교 자리 철교를 헐고 청주대교를 놓았으며, 철교는 제1운천교자리로 이전했었다.

따라서 당시에 시민들은 사직동과 영동을 잇는 통행로로 위험하지만 운천 철교를 이용하기도 했다.

그후 청주역이 80년대 청주MBC자리에서 현재의 정봉동으로 이전(당시 정봉역)하면서 충북선 철로가 오근장∼정하∼정봉으로 변경되고 철교도 정하∼문암쪽 무심천 하류로 이전되면서 운천철교가 철거되고 그자리에 1967년 제1운천교가 건설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무심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사직동 무심천 제방아래에 위치한 ‘용화사’다.

용화사는 조선 광무 6년(1902년)3월 고종의 후궁인 엄비의 명에 의해 청주군수 이희복이 창건했다고 하는데 1992년 국립청주박물관이 이곳에서 발굴한 청동반자의 명문을 판독한 결과 고려후기 큰 사찰이었던 ‘사뇌사’로 밝혀져 신라말이나 고려초 창건된 대찰로 몽고침입 때 소실돼 유물이 매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설에는 신라 선덕여왕때 미륵불 7본존을 중심으로 70칸의 사찰로 창건돼 화랑의 심신단련과 군사들의 충성을 맹세하는 도량으로 활용됐다고 한다.

창건과 관련된 전설은 1901년 엄비의 꿈에 미륵불이 나타나 우리를 도와 달라고 하며 청주군 지주(군수)에게 물어보라고 했는데, 같은 시각 이희복도 같은 꿈을 꿔 늪지대를 파보니 7존석불이 묻혀 있음을 발견하고 엄비에게 보고, 내탕금을 받아 상당산성 보국사를 이곳으로 옮겨 용화사(龍華寺)라 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1935년 화재로 불타버리자 김원근씨가 거금을 들여 충북도청 부속건물인 선화당을 매입, 이곳으로 옮겨 법당을 지었으나 6·25한국전쟁시 또 소실돼 칠존불도 노상에 방치되다가 지난 1972년 비구니 오동림과 신도들이 콘크리트로 법당을 지어 7존불을 안치했고, 1995년 월탄스님이 목조로 용화보전을 건립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7존미륵석불은 1976년 충북도 유형문화재 14호로 지정됐다가 1989년 보물제985호로 승격됐다.

7존불은 여래입상4, 여래좌상1, 2 보살좌상1, 유마상으로 보이는 불상1이며 우아하고 정제된 수법의 조각수준이 매우 뛰어나다.

석불상군 뒤로 1000개의 작은 불상을 모셔 장엄함을 더해주고 있다.

/글 김주철기자, 사진 김운기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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