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44>
실크로드 <4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4.25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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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8시에 호텔을 출발했다.

호텔에서 운영하는 승합차를 이용하여 뭐카오쿠(莫高窟)로 가기로 하였다.

시내를 벗어나자 사막이 시작된다.

30여분쯤 달려 시내에서 25km 떨어진 둔황 매표소 입구에 도착했다(입장료 80元). 뭐카오쿠 앞 하천에는 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메마른 하천이 햇볕에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매표소에서 소지품을 가지고 들어가지 못하게 해서 짐을 맡겨야 했는데 별도로 보관료까지 받는 것에 다소 불쾌해졌다.

타오르는 횃불이란 뜻의 ‘둔황’은 고대 실크로드를 따라 떠나는 여행자들이 중국에서 마지막으로 여정을 푸는 곳이다.

황량한 고비사막과 무시무시한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려는 대상들과 순례자, 군인들은 예측할 수 없는 사막의 기후와 침략자들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여정의 무사 안녕을 빌기 위해 석굴 사원을 찾아 기도를 올렸다.

서역에서 도착한 대상들과 순례자들도 저 황량하고 무서운 사막을 무사히 건너게 해준 데 대해 이곳에 들려 감사를 올렸을 것이다.

둔황은 서역 남북로가 만나고 갈리는 교차지점이기 때문에 육로를 이용할 경우 이곳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한다.

여기서 갈라진 실크로드는 서쪽으로 1000km 이상 떨어진 카슈에서 다시 합쳐진다.

또한 둔황은 전략적 요충지로서 한무제는 기원전 111년에 이곳에 첫 번째 군(郡)을 설치하여 성을 쌓게 했다.

둔황은 2000년 전부터 사람들의 물결로 북적댈 만큼 동방과 서방에서 온 대상과 순례자들이 쉬어가는 중간 기착지였다.

기나긴 여행끝에 이곳에 머물며 장사를 했고, 중국과 서역을 포함한 다양한 문화가 섞여 다채로운 여흥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발굴된 악기와 당시의 회화 그리고 문헌들을 통해 볼 때 이곳이 동서양의 음악교류에 큰 몫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교역으로 살아가던 많은 민족들이 이곳을 거점으로 삼으면서 둔황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 갔으며 인도, 중국, 중앙아시아 그리고 서구의 문화가 만나는 지점이기도 했다.

이곳은 대상들이 옥문관(玉門關)을 통과해 첫 번째 오아시스를 만날 때까지 식료와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마지막 공급처였다.

옥문관은 옥(玉)이 중국으로 운반될 때 통과하는 둔황의 서쪽 관문이다.

더할 수 없이 높은 굴이라는 뜻의 뭐카오쿠(莫高窟)의 기원은 전진(前秦) 2년(366년) 낙준이란 스님이 광휘로운 구름에 싸여 있는 천명의 부처를 이곳에서 본데서 유래하였다.

낙준은 부유하고 신심이 깊은 어느 순례자에게 여행을 마치고 안전하게 귀향하기 위해서는 지역 화공(畵工)을 사서 석굴 하나를 아름답게 장식하여 부처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설득해서 석굴을 팠다.

그 뒤를 이어 법량선사(法良禪師)가 절을 창건했다.

두 스님이 이곳에 석굴을 판 것이 천불동의 남상(濫觴)이다.

그 뒤를 이어 관원이었던 건평(建平)과 동양(東陽)이 석굴을 팠다.

그러므로 낙준과 법량이 여기에 개산을 하였고 건평과 동양 두 사람은 그 유업을 이은 것이다.

그 후 수백 년 동안 이를 선례로 해서 많은 석굴사원이 벼랑에 생겨나게 되었으며, 사원 내부가 찬란하게 장식되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뭐카오쿠(莫高窟) 혹은 천불동(千佛洞)이라 불리는 불교 회화의 정수가 태어나게 되었다.

초기에 건축된 석굴 사원들은 대개 벽면과 천장에 벽화가 그려져 있고 중앙에 점토로 만든 큰 불상을 중심으로 수많은 작은 불상들이 에워싸고 있는 형태의 작은 동굴이었다.

대상들과 순례자들은 힘든 여행길을 앞두고 불상 앞에서 여행의 안전한 귀향을 간절히 염원했다.

그리고 이들은 돈과 불상을 부처님 앞에 봉헌했는데 이 시주를 바탕으로 불교 벽화가 그려진 새로운 동굴들이 1600m 길이의 석벽에 속속 생겨나게 되었다.

당나라 때에는 이곳에 1000개 이상의 석굴사원이 있었으나 현재는 492개만 남아 있다.

실내에는 벽화와 조각 그리고 봉헌자의 소원을 엿볼 수 있는 많은 명문(銘文)들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첫 번째 방문지는 29호 석굴로 석실 안에 석가를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 7명이 있으며, 벽에는 수많은 작은 불화가 장식되어 있다.

정사각형 바닥에 천장은 정 가운데를 높이 4∼5단으로 움푹 파서 오늘날 천장벽지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문양들로 장식했다.

2층 계단을 올라 320호 석굴로 갔다.

천장 가운데 화려한 꽃문양 장식으로 주변 천장에는 수많은 작은 부처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다리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의자에 앉아 있는 부처상은 처음 보는 특이한 양식이다.

채색화 벽면 둘레에는 유리로 둘러 쳐져있다.

336호와 337호 석굴은 철문으로 닫혀 있어 335호 석굴을 들어섰다.

이 석굴은 당(唐)나라 초기(618∼704년)의 작품으로 천정 지붕의 꽃무늬와 주변의 작은 불화들, 부처를 중심으로 2명의 스님과 4명의 보살상이 그려져 있는데, 얼굴이 통통한 것이 특징이다.

벽면으로는 큰 불화가 그려져 있는데 가운데 검은 얼굴색에 붉은 가사장삼을 입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당초(唐初) 승려들의 복장이나 화풍을 느낄 수 있다.

둔황 장경동진열관(藏經洞陳列館)에 들렸다.

다양한 문자를 복사하여 진열하여 놓은 자료실이다.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와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기, 만다라, 불화도, 4-5m짜리의 두루마리 글씨, 정교하게 쓴 10m짜리 두루마리 족자 글씨, 붉은 색조를 바탕으로 한 화려한 채색불화가 전시되어 있다.

읽을 수는 없지만 당나라 시대의 티벳 슈트라(Tibetan Sutra)글씨 등이 퍽 인상적이다.

주로 당나라 시대의 불화나 문자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시인·극동정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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