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차를 마시며
꽃차를 마시며
  • 충청타임즈
  • 승인 2010.07.05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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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목소리
강연철 <감곡성당 보좌신부>

누구나 자주 가는 단골집이 몇 군데 있을 것입니다.

자주 찾는 단골집은 가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어떤 매력이 한두 가지 있습니다. 보편적으로 보면 단골집은 또 세련되거나 화려한 곳이기보다는 소박하면서도 아주 인간적인 면이 느껴지는 곳이 대부분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자주 들르는 단골집이 하나 생겼습니다. 도안이라는 작은 마을에 시골집을 얻어 수도생활을 하는 수녀님들의 공동체입니다. 수녀님들은 가난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 그들과 하나 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사람 속으로 들어오신 분들입니다. 공부방을 열어 농촌의 소외된 아이들 공부를 도와주고, 농사도 짓는 것이 수녀님들에게 주어진 소임입니다. 그리하여 수녀원 건물부터가 다릅니다. 재래식으로 지어진 소박한 시골집입니다. 삐걱 소리를 내는 옛날 대문에 마당도 있고, 텃밭도 있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수녀원이라 그런지 다른 집들보다 꽃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버리는 것이 없는 수녀님들은 꽃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아까우셨는지 짬짬이 꽃을 따서 향기를 가득 머금은 꽃차로 만드셨습니다.

그저 눈으로 보고 코로 향기 맡는 꽃인 줄 알았는데, 찻잔 속에 담겨 있는 향과 빛을 마셔 보니 그 매력에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소박한 꽃찻집, 마담 수녀님(?)이 우려 주는 꽃차의 향에 한 번 취하고 나서부터는 단골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향기를 혼자 맡는 것이 아까워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더불어 찾아 갑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아끼는 사람들, 소중한 사람들 몇몇과 함께 갑니다.

함께 가는 사람들이 각양각색이듯, 수녀님들이 내놓는 꽃차도 형형색색 온갖 꽃이 다 모인 작은 꽃밭입니다. 붉은 빛깔을 내는 맨드라미, 산뜻한 향을 내는 산초, 약간 끝 맛이 아린 국화, 이름 모를 꽃들까지. 수녀님은 유리 주전자 안에 말린 꽃들을 함께 넣어 빛과 향을 우려 주십니다. 꽃의 빛과 향이 우러나는 동안 함께한 사람들은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고 이내 웃음 꽃이 핍니다. 사람 사는 향기가 풍겨 납니다.

꽃차는 물이 우려 질 때마다 빛깔이 바뀝니다. 처음에는 맨드라미의 붉은빛이 진하게 우러나오다가, 시간이 지남에 산초의 푸른빛도 보이고, 나중엔 국화의 노랑빛도 나타납니다. 입 안에 맴도는 향도 물이 우려질 때마다 조금씩 바뀝니다. 처음엔 산초향이 입 안을 싱그럽게 만들다가도, 오래지 않아 입 안에는 국화향기 가득한 가을이 옵니다. 이어 맨드라미도 피고, 알지 못하는 작은 꽃들도 연이어 피어 납니다. 어느새 꽃차를 머금은 입 안은 온갖 꽃향기가 가득한 꽃밭이 됩니다.

꽃은 자신만의 빛깔이 있고 향기가 있습니다. 그 꽃이 자신만의 빛깔도 향기도 내지 못한다면 더 이상 꽃이기 어렵습니다. 각자의 빛깔과 향기를 낼 때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밭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꽃입니다. 각자 가진 색깔이 있고, 풍기는 향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과 성향이 다르다 하여 꽃을 짓밟는다면 그 꽃이 없어져 아름답고 향기로울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발자국이 남아 흉하게 되고, 한 가지 향기만 맡다 보면 후각이 무감각해져 향기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되어 버립니다.

근래에 때 아닌 된서리와 비바람이 수많은 꽃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습니다. 전에 없던 발자국들이 꽃밭 여기저기 생겼습니다. 그러나, 짓밟히고 꺾어져 말라 버려도 꽃은 꽃입니다. 짓밟힌 꽃은 거름이 되어 다른 꽃으로 피어날 것이고 꺾여 말려진 꽃은 꽃차가 되어 찻잔 안에서 다시 피어 향기를 풍길 것이니 말입니다.

꽃차 안에 진하게 담겨 있는 꽃향기를 한 모금 머금으며 이 땅의 지도자들이 평화로운 사회, 정의로운 사회를 원하는 민심의 향기도 머금길 소망해 봅니다. 다양한 빛깔로 아름답게 우러나는 찻잔에 담긴 꽃차를 바라보면서 한 가지 빛깔만을 강요하는 힘 있는 자들의 요구는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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