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백목련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5.03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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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밖으로 나설 때면 내손에는 여지없이 여러 개의 짐 보따리가 들려 있다.

분류된 쓰레기 봉지가 두어 개는 되고, 거기다 쓸 것과 버릴 것을 사려 놓은 가재도구들을 한 가지씩 들고 나오기 때문이다.

때로는 양쪽손이 모자라 놓치기도 하고, 그런 날은 과한 무게에 짓눌린 어깨와 손목이 저려오기까지 한다.

하루를 종종걸음 치며 사는 나로서는 일각의 촌음이라도 아껴보려는 심사로 외출 때마다 쓰레기 수거장에 들르다보니 빈손일 때가 거의 드물다.

개미처럼 부지런하게 소품 하나라도 집안에 모아들이는 것이 보통 주부라 할 수 있으련만, 요즘의 나는 밖으로 덜어내는 일이 더 많은 것을 어찌하랴.알뜰살뜰한 백점자리 주부 역할이 역시 내게는 버거운 자리인 모양이다.

겨우내 추위를 피해 꼭꼭 여미기만 하던 습관으로 허접스런 살림살이들을 첩첩으로 쌓아 놓았고 보이지 않는 곳에 밀쳐 두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따뜻한 햇살이 창가에 찬란하게 부서져 내리는 봄이 왔건만 집안은 환하게 밝아지지 않고 늘 칙칙한 기운이 감돌았다.

꽁꽁 얼었던 실개천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청량하고 빈들에서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 준비로 분주했지만, 유독 집안만은 가라앉고 옥죄인 느낌으로 답답했다.

아주 드물게 쓰는 용품들이 가득 널려져 있는 주방을 둘러보아도 그렇고, 빼곡히 들어찬 신발들로 빈틈없는 신장을 열었을 때도 머리가 무거웠다.

생활하는데 지장이 없을 만큼만 소유해야 함에도 지금껏 왜 그리 과욕을 부리며 살았는지.그리 넓지도 않은 삶의 영역 안에서 사물에 대한 욕심도 하릴없었지만, 이내 가슴은 사랑의 허욕마저 부리며 늘 목말라 했다.

나눌 줄도 모르면서 받으려만 하는 독선적인 삶이 하루를 황량하게 만들었고 빈 가슴속에는 채워지지 않은 허기로 늘 지쳐 있었다.

얼마쯤 세월이 지나 삶의 뒤안길을 돌아보면 따스함으로 채워져야 할 가슴은 무미건조하게 말라있고 집안에는 불필요한 잡동사니들로 빽빽하게 들어차 어수선했다.

인간관계에서도 배려와 양보를 모르는 인색함에 허덕이고 냉랭한 독선과 아집은 사람들과 맺은 인연들을 멀찍이 떼어 놓기도 했다.

채우려는 마음보단 무한이 퍼내어서 나누려는 인정이 진정 사랑이며, 그러한 가슴에 봄햇살 같은 따스한 사랑이 내릴 수 있다는 걸 옹색한 인격은 쉽게 깨달지 못한다.

언제나 지난날을 돌이키며 회한만을 남기고 조건의 모자람에 갈급하며 심신의 여백들을 엉뚱한 잡동사니들로 치장하는 아둔함으로 여전히 또 내일을 살지도 모를 일이다.

연륜의 두께가 더 해지고 인생의 황혼 언덕이 가까워지면 내안에 잠재된 욕심은 저절로 한 홀 한 홀 벗어지는 줄 알았다.

활화산처럼 타오르던 욕망도, 성공을 향해 달음박질치던 조급함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한 경쟁의식도 이제는 내안에 얽혀있는 끈에서 놓을 줄 아는 느긋함을 알아야 하거늘. 그러나 떨구지 못한 욕심들은 무쇠 솥단지 밑바닥에 붙은 검댕이처럼 덕지덕지 쌓여만 가고 허상은 습관이 되어 하루하루 무심히 살아간다.

삶의 혜안이 뜨이는 날, 잡동사니들로 가슴 그득하게 짓눌리던 답답함 훌훌 날려버리고 지천명의 고갯마루를 향해 비상하듯 무한이 오를 수 있으련만.하루에도 몇 번씩 하늘과 땅 사이를 오르내리며 욕심과 아둔함을 사려내 버릴 수만 있다면 어께가 휘고 손목이 저려오면 좀 어떠하리. 헐렁해진 삶의 여백에서 참된 행복만을 내 것으로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을./수필가 정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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