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그 이름으로 산다는 것
아버지, 그 이름으로 산다는 것
  • 충청타임즈
  • 승인 2010.03.18 21: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타임즈 포럼
오창근 <E.M.S 학원 중등 원장>
꽃샘추위에 몸을 움츠리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늦은 저녁상 물리기 전에 걸려온 J의 전화에 괜한 궁금증이 든다. 술집 문을 열고 이리저리 눈을 돌려 구석에 앉아 깊게 담배연기를 들이켜는 J를 찾았다. 얼마 전에 만났을 때 파마머리를 하고 나타나 사람들로부터 잘 어울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치렁한 머리에 고개를 떨어뜨린 자세를 고치며 왔느냐며 악수를 건넨다. "이 시간에 웬일이냐" 묻는 물음에 그냥 술 한잔하고, 보고도 싶고 해서 불렀다며 건조한 몇 마디를 던진다. 낯선 모습에 무슨 일이 있는 것 아니냐고 재차 물어도 그동안 술 한잔 못 사주고 해서 불렀다며 말을 돌리지만, 얼굴은 어둡고 수심은 그득했다.

차림표를 건네며 먹고 싶은 것 아무거나 시키라며 거듭 재촉을 한다. 호기를 부리며 이것저것을 주문하는 그 모습은 예전에 보아 온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망가지고 싶은 중년의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간다.

온화한 미소와 차분하고 사려 깊은 모습에 주어진 일도 열심히 하며 나름대로 기반을 잡은 사람이다. 대학 사 학년 때 이른 결혼을 해서 아들 둘 두고 오순도순 살아가는 평범한 가장이다. 술에 취해도 큰 실수하지 않고, 동갑내기 아내가 무서워 귀가를 서두르는 모습을 보고 짓궂게 농을 해도 허허 웃으며 넘어가는 넉넉한 사람이다.

서너 병의 소주병이 비껴가자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고등학교 이 학년이 된 아들 녀석이 "아빠의 모든 것이 싫다."라고 하며 가슴에 못 박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술도 입에 대고, 여자도 가까이하며 아버지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과 행동을 해서 온몸에 힘이 빠져 축 처진 어깨로 이 낯선 술집에 앉아 있는 것이다.

학교 선생님이었던 아버지의 이중적인 모습이 싫어 절대 아버지를 닮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고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열심히 살았는데, 이제 머리 굵어가는 아들 녀석에게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현실이 그를 자책하게 하고 있다. 눈물이 그렁한 얼굴에 대학교 졸업도 하기 전에 아들이 태어나 먹고 살기 위해 아파트 지하에서 밤을 새우며 기름보일러를 때며 삼 년의 시간을 보냈다며 처음 듣는 이야기를 한다. 가장의 짐을 짊어지고 온 힘을 다해 살아왔다며 그 옛날 주사(酒邪) 부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감추고 산 낡은 삶을 술안주로 꺼내 놓는다.

폭설주의보가 내린 밤하늘은 어둑해지고, 조금은 쌀쌀한 바람이 문틈을 헤집는다. 연거푸 피워대는 연기에 시야가 흐려진다. 미지근하게 식은 어묵 국물을 떠먹으며 술잔을 잡는 그의 손이 위태롭다.

약주를 드시고 어머니한테 폭언을 쏟아내시는 아버지의 기억이 떠오른다.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취기 어린 눈에 실핏줄이 날카롭게 서서 어머니와 말다툼하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그 모습이 너무 싫었던 기억이 난다. 다정한 말 한마디 없이 툭툭 던지는 윽박지르는 그 모습이 보기 싫어 둥구나무 밑에 앉아 시간을 보내던 어린 내 모습도 보인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힘을 잃고 기운이 빠져 작아진 아버지를 씻기며 그래도 가끔은 무섭게 혼내던 서릿발 같은 모습이 그리운 적도 있다.

어쭙잖은 위로에 고맙다며 술잔을 건넨다. "우리도 그러면서 성장하지 않았느냐고 좀 더 크면 그 녀석도 이런 아버지 마음을 이해할 때가 올 것"이라고 나도 경험해 보지 못한 말을 주워섬긴다. "글쎄, 그럴까 그래, 그렇겠지." 하며 가누기 어려운 몸을 비틀거리며 아파트 사이로 접어든다.

마중 나온 아내 손에 끌려 사라지는 J의 뒷모습에서, 나를 끌어안고 삭히기 위해 몸에 술을 붓고 담 모퉁이 쓸어내리며 걸어가는 젊은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