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이트날에 마음을 베이다
스케이트날에 마음을 베이다
  • 충청타임즈
  • 승인 2010.03.14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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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
오창근 <E·M·S 학원 중등 원장>
긴 팔다리로 은반 위를 우아하게 가로지르는 한 소녀의 화면이 연일 방영되었다. 보철을 낀, 조금은 촌스러운 꼬마의 모습과 이젠 여왕이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럽게 입에 붙은 해설자의 경탄도 귀에 익다.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속을 태우던 시간도 잠시 세계신기록을 달성하며 당당히 경기를 끝내고 울음을 터뜨리는 그녀의 모습에 한동안 넋을 놓는다. 피겨 스케이팅에 문외한인 터라 넘어지는 실수만 하지 않으면 잘했다는 평가밖에 할 수 없는 처지지만 '다 이루었노라.' 세상을 향해 일갈을 하듯 두 팔을 번쩍 쳐들고 관중에게 인사를 하는 모습에 감동이 밀려왔다. 그리고 그녀의 하염없는 눈물.

밴쿠버 동계 올림픽이 시작되기 전부터 각종 언론에서는 금메달 수상을 당연시했고, 그녀의 성장과정을 반복해서 보여주며 피겨 스케이팅의 불모지에서 캐낸 보석 같은 존재로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다 차려진 밥상인 양 들떠 있다 혹시 실수나 해서 금메달을 따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내심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아사다 마오' 와의 라이벌 관계를 수도 없이 들먹이며 방송과 언론의 과열된 취재 경쟁과 한·일 관계라는 특수성을 교묘히 이용해 지면을 도배하다시피 한다.

작은 일화로 끄집어내어 기삿거리도 만들고, 일본의 팬들이 분풀이로 다는 댓글조차 소개할 정도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좋은 소재가 된다. 그러나 지나친 언론의 관심과 가십거리로 다루는 일부 기사들이 조금은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였다는 뿌듯한 자신감도 좋지만, 아직도 갈 길이 먼 앳된 소녀의 삶이 놓여 있다.

베이징 올림픽 수영에서 금메달을 딴 박태환 선수가 2009 로마 선수권대회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내자 언론은 싸늘했고, 각종 광고에 얼굴을 내밀었던 것을 두고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모든 운동 경기에는 부침이 따를 수밖에 없다. 수영이나 피겨 스케이팅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메달을 기대할 수 없었던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좋은 선수가 나왔고, 훌륭한 코치를 만나 기대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 냈고 국민은 환호했다. "국내에서 치러지는 경기를 포기하고 싶었다."라고 말하는 그녀의 고백 속에서 그녀가 얼마나 심적 부담을 느껴는지 짐작할 수 있다.

IMF 외환위기를 겪을 당시 국민에게 힘과 용기를 준 박찬호 선수가 '먹튀'라는 오명을 쓰고 벤치에 있을 때 카메라는 또 다른 스포츠 스타를 쫓기 바빴다. 골프의 박세리 선수, 영국에서 활약하는 축구의 박지성 선수, 화려하고 국위를 선양하는 그들에게 초점이 맞춰지고 슬럼프를 겪는 선수는 쉽게 잊힌다. "나에 대한 차별은 조국을 차별하는 것 같아 참을 수 없었다."라고 하며 한국을 알리기 위해 손톱깎기에 쓰인 코리아라는 글귀를 보여 주었다는 박찬호 선수의 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개인과 국가의 명예를 위해 묵묵히 운동하는 선수들이 많다. 평소엔 비인기 종목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가 그들이 메달을 따면 온갖 화려한 미사여구를 동원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고 연예인처럼 사소한 것까지도 들먹이며 그들의 지나온 삶을 조명한다.

이 세상에 갑자기 되는 것은 없다. 특히 흘린 땀방울만큼 결과를 얻는 것이 운동이다. 몇몇 종목의 선수들은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부와 명예를 이룰 수 있지만, 대다수의 선수는 졸업과 동시에 갈 곳을 잃어 백수로 전락하는 경우도 많다.

일등만 기억하는 얄팍한 사회보다는 비인기 종목의 설움을 딛고 굵은 땀방울을 흘리는 선수들이 안정된 위치에서 운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국가적 지원이 선행되어야 한다. 달콤한 열매만 따 먹고 시청률만 올리려는 우리 사회의 안일함이 개선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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