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천
무심천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4.27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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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가장 강렬한 봄의 인상(印象)이 뭐냐고 묻는다면 아직까지는 ‘민들레’다.

오늘은 나름대로의 민들레 삼선(三選)을 놓고서 맑고 차가운 계곡물에 발을 담근 심정으로 말하고 싶다.

‘민들레처럼 살아야합니다/차라리 발길에 짓밟힐지언정/노리개꽃으로 살지맙시다/흰 백합 진한 장미의 화려함보다/흔하고 너른 꽃 속에서 자연스레 빛나는/우리 들꽃의 자존심으로 살아야합니다//네 알겠습니다.

/특별하지 않아도 빛나지는 않아도/조금도 쓸쓸하지 않고 봄비 뿌리면 그 비를 마시고/바람 불면 맨살 부대끼며/새 눈과 흙무더기 들풀과 어우러져 모두 다 봄의 주체로/서로를 빛나게 하는/민들레의 소박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박노해. ‘민들레처럼’중에서)어둑한 감치방(監置房)에서 노란 민들레꽃을 코에도 볼에도 대어보고 눈에도 입에도 맞춰보며 흠흠거리던 박노해의 모습이 절로 떠오르지 않는가. 지극히 제한된 구속의 공간에 있으면서도 한 송이 민들레꽃을 손에 들고서 거칠 것 없는 생명의 향기에 취해 ‘산다는 것’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그는 진정한 자유인(自由人)이었다.

그의 시를 몇 번이고 소리내어 읽는 동안, 나는 자신에게 말하는 듯하다가도 어느 덧 옆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진군(進軍)의 행렬을 확장시키는 그의 힘을 느꼈다.

‘노오란 내 가슴이/하얗게 여위기 전 그이는 오실까//당신의 맑은 눈물 내 땅에 떨어지면/바람에 날려 보낼 기쁨의 꽃씨//흐려오는 세월의 눈시울에/원색의 아픔을 씹는 내 조용한 숨소리//보고 싶은 얼굴이여.’(이해인. ‘민들레의 영토’중에서)이해인을 보고 베로니카(Veronica)를 떠올린다.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끌려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로했다는 전설에 나오는 예루살렘 여성, 베로니카, 피로 물들어 걷는 예수의 모습을 보고 군중 속에서 달려 나와 얼굴을 닦는 천을 바쳤더니, 예수는 그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다시 돌려주었는데, 그 수건에 예수의 얼굴이 새겨져 나왔다는 구전(口傳)의 주인공이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까지 걸은 600m의 비아돌로로사(Via Dolorosa, 슬픔의 길)는 그가 극심한 고통 속에서 걸은 마지막 길이었는데, 이해인의 ‘보고 싶은 얼굴’은 베로니카의 수건에 새겨진 예수의 얼굴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침내,/민들레의 노란 함성으로 땅이 들썩거린다.

//벚나무의 꽃비 따라/길고 긴 상념(想念)도 사라졌거니 했는데…/점령의 영토를 넓혀 가는 민들레를 보고 있자니/봄의 끝자락이 보이지 않을 성싶다.

//갑자기,/민들레 기차를 타고 싶다.

//두터운 외투를 벗지 못한 채/감기마저 달고 사는/허리가 구부러진 사람들을 가득 태우고/여름 바닷가 넘실대는 파도로/가까이 가고 싶다.

’(강대헌. ‘민들레 기차’중에서)나의 민들레는 무엇인가를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잠시 후면 사라지고 말 헛되고 헛된 바람을 가득 불어넣은 풍선(風船)에 매달려서 위험천만한 공중곡예를 서슴지 않는 약(藥)도 없는 철부지로만 살아가서는 아니 될 노릇이기에, 이제 얼마 지나지않아 수천 수백의 꽃씨로 허공을 날게 될 민들레 비행군단(飛行軍團)을 통해 또 다른 ‘생명 경외(Reverence for Life)’의 신호탄을 펑펑 날리고만 싶다.

내게 남겨진 것의 소중함을 알지 못할 때, 우리들의 삶터는 한 송이 민들레조차도 찾아볼 수 없는 황무지 빈터가 되고 말 것이다.

/청주기계공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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