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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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4.07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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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인가 일본 나리타 공항에서 교토로 가는 비행기를 탄 적이 있었다.

일본 특유의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책장이나 신문 넘기는 소리가 간간이 들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세상이 온통 가시적인 TV와 컴퓨터 문화로 급속히 변해가고 있는 즈음이라서인지 기내에서 많은 사람들이 책을 보는 모습은 감동처럼 잔잔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생존을 위하여 너무나 바쁘게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학생들은 더 좋은 상급학교 진학을 위하여 학습에 관한 책만 보다가 스폰지처럼 흡입력이 좋고 정신적 유연성과 신축성이 가장 왕성하며 감수성이 고조되어 있는 청소년기를 다 보내버리고 정신적 각질화가 되기 시작하는 성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우리는 정신적 유연성이 가장 좋은 청소년기에 보다 많은 음악과 문학을 접하고 직간접적인 경험을 시도해봄으로 해서 아직 경계선이 설정되지 않은 내면의 정신세계를 끝없이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깊이 있는 전문가가 되라는 것은 아니다.

모두 다 음악과 문학을 창조하는 사람이 되자는 얘기가 아니다.

적어도 음악을 듣고 감흥을 느끼며 행복감에 젖을 수 있는 정도와 시 한편을 읽고 하늘을 바라보며 가슴으로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정신세계를 갖자는 얘기이다.

어쩌면 우리는 디지털 시대에 디지털화 된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치의 오차도 여유도 없이 예정된 계획과 시간을 따라 걸어가고 있는 디지털화된 모습으로 말이다.

이 시대에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하며 살아간다면 모두들 시대착오 속에 사는 덜 떨어진 인간쯤으로 인식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잔의 술을 마시고 버지니아 울프를 얘기하고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할 수 있는 정신적 여유와 사치를 가져야 한다.

미술은 잘 모르지만 그림에는 여백의 공간이 있다.

미술 하는 사람들은 그 여백의 공간이 그림의 미를 극대화시켜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한숨 돌리며 쉬어가는 여유를 갖게 하기도 한다.

그렇듯이 우리 인간도 여백이 있어야 한다.

특히 지금 이 시대에 더욱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여백의 역할이 바로 문학이나 음악, 미술을 감상하고 즐길 줄 알고 거기서 마음의 여유를 찾고 일상생활에서 찌들어 삭막해진 마음을 위로 받는 일 일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한편의 시보다는 한번의 클릭으로 사이버 세상을 열어 그 속을 들여다보며 탐닉하고, 생각하기 보다는 보여지는 현상에 현혹되어 시간의 흐름조차 망각하는 디지털 세상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아직 어린나이에 정신적 유연성은 사라지고 마치 청소년기에 육체적인 성인병을 앓는 것처럼 정신적 각질화가 일찍 시작되는 현상이 많은 청소년들에게 나타나고 있다.

여러해 전부터 프랑스에서는 정부와 시민단체가 주도하고 여건을 마련하여 국민들이 시낭송을 생활화하고 있다한다.

프랑스 사람들은 보들레르 무덤에서, 학교에서, 교도소에서,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라면 어디에서든 시낭송을 자연스럽게 일상화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도 디지털문화로 정신적 각질화가 되어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정부차원에서 주도한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도 서둘러야한다.

우리 각자가 한편의 시로, 아니면 한편의 수필로 각질화된 정신을 유연하게 만들고 잃어버린 삶의 여백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슴에 닫혀 있는 서정의 창을 열고 그창을 통해서 이 봄밤 가슴으로 불어오는 삶의 여백 가득한 미풍을 느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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