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찻잔 속의 매화
<특별기고>찻잔 속의 매화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4.03 22: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 모든 것이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고 변한다.

나에게도 청주를 떠나야 하는 인연이 있어서 평소 좋은 말씀을 해주신 스님을 찾아뵈었다.

‘와우산 수도원’이라는 대한불교 수도원 도량이다.

청주시 상당구 수동에 있는 우암산 등산로 입구에 있어서 그런지 사찰에 들어선 순간부터 심산유곡에 온 듯하다.

법당에 들러 부처님께 삼배 드리고 주지스님을 찾아뵈었다.

주지이신 설곡 스님께서는 반갑게 맞아주시며 경내에 있는 봄꽃들을 안내해 주셨다.

복수초, 노루귀는 벌써 지고, 산수유꽃이 노랗게 피었다.

스님은 나의 손을 잡고 매화나무로 가셨다.

그리 크지 않은 매화나무에는 꽃봉오리가 많아 달려 있고 활짝 핀 꽃도 있었다.

향기를 맡아보니 진하게 느껴졌다.

스님께서는 지금이 가장 매화가 좋다고 하셨는데, 올봄에는 꽃샘추위가 늦어 지난해보다 늦게 핀다고 하셨다.

스님은 반쯤 핀 매화꽃 네 송이를 따서 두 손으로 소중하게 감싸고 차 한 잔 하자며 방으로 들어갔다.

스님은 직접 따온 매화꽃을 조그만 찻잔에 담고 뚜껑을 덮어 놓으셨다.

그리고 물을 올리고 다기를 씻었다.

차 탁자 앞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찻물이 사르르 사르르 하면서 끓었다.

탁자를 손으로 만져 보았다.

투박하면서도 나뭇결이 부드러웠다.

오래 써서인지 굴곡이 많았다.

스님은 이 탁자가 수백 년은 넘었을 거라고 하셨다.

옛날에 떡판으로 썼는지 칼에 패인 자국이 보였다.

오랜 풍상을 겪은 나무가 자신의 몸을 눕혀 떡판으로 되었다가 다시 차 탁자가 되어 있는 것이었다.

스님께서는 익숙한 솜씨로 차를 우려내고는 찻잔 속에 차를 따르고 그 위에 매화꽃을 띄우셨다.

매화꽃이 조금씩 움직이더니 꽃잎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수술이며 암술이 꼿꼿하게 서면서 찻잔 속에 한 송이 매화꽃이 활짝 피었다.

찻잔 속에 핀 매화꽃 향기는 밖에서 본 것보다 훨씬 진하게 느껴졌다.

몇 잔을 마시니 코로만 맡았던 것과는 달리 눈 주위가 시원하고 몸에서 땀이 날 정도였다.

그 묘한 향에 취하는 것 같았다.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것은 술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게 운치이고 풍류라면 가끔씩 즐기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얼마 전에 입적하신 화계사 조실 숭산 스님께서는 세계는 한 송이 꽃과 같다고 하는 세계일화(世界一花)를 즐겨 쓰셨다.

서로 다른 피부 색깔과 언어, 종교를 가졌지만 그 뿌리는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온갖 존재는 한 뿌리라고 한다.

모든 존재를 관통하는 이치를 진리라고 한다면, 그 진리가 힘이 센 나라나 힘이 약한 나라에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요,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언어와 문화, 역사가 다르다고 해서 조금의 차별도 없는 것과 같다.

지구의 중력이 미국 다르고, 한국 다르고, 아프리카에서 다르게 적용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태어나서 다른 이들에게 향기로 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사회에 향기를 선사하기는커녕 악취를 풍기는 사람이 많다.

청빈한 선비나 수행하는 스님들은 가진 것이 적다.

그러나 스스로를 비워버린 사람에게는 무서운 힘이 있다.

매서운 겨울 눈바람 속에서 파르르 떠는 매화꽃을 보는 자비의 눈이 있다.

찻잔 속의 매화는 내게 조용한 봄의 교향곡으로 남아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