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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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4.13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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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지인(知人)과 더불어 어느 레스토랑에 식사를 하러 들렀다가 메뉴판에 적혀 있는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다.

‘먹고 사는 일의 고단함. 그리고 그것의 위대함은 가난하거나, 그것으로 상처를 받았거나, 스스로 생계를 꾸려본 자는 다 알리라. 저녁 황혼 속에서 밥 한 그릇을 이고 퇴근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들이 세상을 굴려가는구나 싶어 가슴이 숙연해집니다.

취직하려고 도서관에 빼곡히 들어차 공부하는 학생들을 봐도 눈물겹습니다.

’그 글은 ‘싱글 맘(Single Mom)’ 스토리로도 알려진 신현림이 쓴 ‘희망 블루스’ 중의 한 대목이었다.

정말 그의 말대로 먹고 사는 일의 만만치 않음을 나이가 들수록 절감하게 된다.

또한 그가 책의 제목에서 ‘희망’이란 말에다가 ‘블루스(Blues)’라는 말을 연결시킨 뜻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블루스가 무엇인가. 블루스는 미국 대중음악의 하나로서 19세기 후반에 남부 흑인 사이에서 발생한 가곡인데, 노예해방 후 개인생활을 할 수 있게 된 흑인이 인종차별과 극도의 생활 빈곤 문제로 인한 고뇌와 절망감 등을 기타를 치며 말하는 형식으로 표현하여 생겨났다고 한다.

블루스는 재즈의 모체도 되었고, 미국 흑인음악의 근원이며, 미국 흑인의 혼(魂)의 음악, 정신적 기반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책의 제목을 희망이란 양극적(陽極的) 요소에다가 블루스라는 음극적(陰極的) 요소를 단순히 대치시켜 놓은 어줍은 형태의 말의 조합으로 보아서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아마도 작가는 희망을 블루스의 곡조로 읊어보자는 것, 곧 삶의 블루스가 희망을 낳는 자양분(滋養分)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뜻을 말하고 싶었으리라.지금부터는 내가 생각하는 두 가지를 ‘희망 블루스’로 추천하고 싶다.

먼저 지난 번 칼럼(3월 30일, ‘얼음 깨기’)에서 소개한 ‘브레이킹 디 아이스 캐러밴’을 이 시대의 희망 블루스로 추천한다.

그들은 26일간에 걸친 사하라사막 생활의 고통과 좌절감 속에서도 마침내 인종과 종교의 갈등을 넘어서 오로지 중동 평화를 위해 5500㎞의 대장정을 끝마침으로써 분열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는 지구촌(地球村)에 따스한 위로를 주었다.

‘증오를 해소하는 얼음 깨기는 계속된다.

우리는 모든 장벽을 부술 것이다(Breaking the Ice is going on. We will break all the walls)’는 그들의 하나 된 외침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하루를 ‘사과(謝過)하는 날’로 삼는 것을 오늘의 희망 블루스로 추천한다.

이번 주는 기독교에서 지키는 사순절(四旬節)의 마지막 주간으로서, 특별히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이 일어났던 고난주간이기도 하다.

고난주간의 1주일은 요일마다 성전청결의 날(월), 변론의 날(화), 침묵의 날(수), 번민의 날(목), 수난의 날(금), 비애의 날(토), 부활의 날(일)로 이름이 붙어져 있는데, 오늘은 바로 번민의 날로써 일부 교회에서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을 찾아 사과하고 화해하는 하루로 생활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또한 오늘은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세족일(洗足日)’로도 불린다.

예수는 자신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Iscariot Judas)’의 발도 씻겨주면서 진정한 ‘섬김의 도(道)’가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 주었다.

‘꿈꾸지 않는 사람에게는 절망도 없다’는 버나드 쇼(G. Bernard Shaw)의 말도 있듯이 우리들은 각자의 희망 블루스에 대해 적잖이 꿈꾸며 살아가야만 하지 않을까?/청주기계공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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