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위령성월에 즈음하여
11월 위령성월에 즈음하여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11.02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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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목소리
이길두 <청주교구 교정사목 신부>
11월. 한 해를 마감하기 전 마지막 고비의 달이다. 벼 수확을 마친 들녘 논 밭에는 서리가 묻어있고 나무는 앙상하게 벌거벗었으며 개울을 찬 기운을 더한다. 아침 저녁으로 스산한 기운은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하고 11월 추운 날 논이나 밭길을 걸어본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죽음을 기억하게 된다.

가톨릭 교회는 전통적으로 11월을 위령성월로 정해 돌아가신 영혼들의 넋을 기리고 이들의 영혼을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 드리며 한 달을 거룩하게 보낸다. 또한 나의 죽음에 대해서도 깊이 통찰하며 잘 죽기 위해 잘 사는 법에 대해 신앙안에 깊이 묵상하는 달이다.

프랑스의 저술가 브뤼에르(jean de la Bruyere)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일생에는 세 가지 사건뿐이다. 즉 출생과 삶과 죽음이다. 그런데 우리는 태어날 때는 무언지 모르고 태어났고, 죽을 때는 고통 속에서 죽고, 살아갈 때는 왜 사는지를 모르고 있다."

어떤이는 말한다. "인생은 공허한 꿈이다.", "세상일은 물거품과도 같다.", "인생은 무덤으로 가는 행진에 불과하다.", "인생은 사막이요, 인생은 고독하다.", "인생은 걸어다니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인생 무상", "인생 일장 춘몽"등등. 우리는 끝내에는 인생의 허무를 느낀다.

오늘 이 순간은 살기가 바빠서 이런 생각을 못하고 있지마는 마침내 인생은 죽음으로 허무하게 끝이 난다는 이 사실 앞에 우리 모두는 안달을 한다. 삶의 회의와 인생의 허탈을 느낀다. 이 허탈감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삶과 죽음에 대한 확실한 답변 없이는 우리는 하루도 불안해서 살 수 없다.

삶과 죽음의 운명! 이것이 천명이라고 한다면 그 천명의 주인이신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죽음의 운명을 말씀하실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길만이 천명을 깨닫는 유일한 길이 아니겠는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것이 죽음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곳이 곧 천주교회이다.



여보시오 벗님네 이 내 말 듣소.

지금 말한 이 죽음 잊지 마오.

남의 일로 알고서 잊지 마시오.

그대 역시 조만간 당할 것이오.



남의 부고 우리가 받지 않았소?

우리 부고 남에게 한 번 갈 게요.

남의 시체 우리가 보지 않았소?

우리 시체 남들이 한 번 볼 게요.



지금부터 백년 후 오늘 이때면

우리 해골 땅속에 이미 썩었고

천국이나 지옥 중 그중 어느 곳에

우리 영혼 벌써 가 들어 있겠소.



지옥불에 떨어진 저 모든 영혼

가고 싶어 일부러 간 줄 아시오?

하루 이틀 회개를 미루어 가다

삽시간에 뜻밖에 벼락 맞았소?



부르시는 천주를 저버린 것도

손에 닿은 영복을 내버린 것도

어디가서 누구에게 호소하겠소?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탓인 걸.



시체보고 돌아서 나가는 친구

못 볼 것을 본 듯이 얼굴 변하네.

나가서도 멀찍이 외면을 하네

저런 것을 친구라 믿고 지냈소?



다른 사람 무어라 말들 하든지

다른 사람 무슨 짓 하고 있든지

우리 실속 우리가 차려야 하오.

우리 영혼 우리가 구해야 하오.



해가 뜨고 해가 져 하루가 되면

무덤까지 그만큼 가까워졌고

꽃이 지고 꽃이 펴 한 해가 되면

무덤까지 그만큼 끌려온 게요.

(윤형중 신부 '사말의 노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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