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46>
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46>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5.09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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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의 벽화를 보면서 10세기 때 둔황지역에서 화공(畵工)을 했던 둥바오더(董保德)의 석굴조성 작업과 벽화 이야기를 떠 올려 보았다.

등바오더는 둔황의 화공조합 간사이자 관립 도화원(圖畵院) 소속 화사(畵師)였다.

때는 965년 둔황은 새 왕조인 송나라에 명목상의 충성을 바치고 있었지만, 910년부터 둔황 출신인 차오씨(曹氏) 일족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왕을 자칭한 차오위안중(曹元忠)이 현 통치자였고 등바오더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차오위안중은 도화원 외에 둔황 정부 안에 인쇄국을 설치했다.

그는 왕위에 오른지 1년 뒤인 947년에 우란분을 기념하는 발원문을 인쇄하라고 요구했다.

이 발원문은 사본 여러 부와 함께 1907년 오렐 스타인이 둔황에서 사들인 고문서에 끼어 있었다.

둔황 왕 차오중위한중과 그의 아내 자이씨 부인은 줄곧 불교를 후원했다.

우란분 발원문을 주문한 뒤 몇년 동안 그들은 둔황의 여러 사찰에 수많은 물품을 봉납했고, 그 물품들은 모두 면밀히 기록되었다.

둔황 안팎에는 15개 이상의 사찰과 승방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둔황에서 남동쪽으로 20km쯤 떨어져 있는 뭐카오쿠(莫高窟)라는 석굴사원이었다.

그곳에서 동쪽을 향한 벼랑이 작은 시내 위로 30m가 넘는 높이까지 불규칙하게 솟아 있고 양쪽으로 1.5km 쯤 뻗어 있다.

시냇가에는 포플러와 느릅나무가 자라고 있지만, 시내에는 여름에 홍수가 날 때를 빼고는 물이 거의 흐르지 않는다.

4세기부터 실크로드를 여행하는 승려와 신자들이 이 벼랑에다 여러 층으로 굴을 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참선수행을 하기위한 암자로 굴을 팠지만, 나중에는 불공을 드리기 위한 장소로 굴을 파고 그곳을 장식하기 위해 정교한 벽화와 채색한 불상을 봉납했다.

둥바오더가 한 일은 대부분 기존의 석굴벽화를 복원하고 새로 판 석굴을 장식하는 일이었다.

3년 전인 962년 둥바오더는 차오위안중의 후원으로 새로 조성된 석굴의 장식을 감독했다.

석굴파는 작업은 비숙련 일꾼이 맡았다.

벼랑 기슭에 비계를 세울 자리를 고른 다음 계획된 석굴의 지붕 높이까지 비계를 세웠다.

10세기 중반에는 이미 이 벼랑 대부분이 석굴로 뒤덮여 나무 통로와 계단으로 연결된 수백 개의 석굴이 노란 암벽에 벌집처럼 뚫리어 있었다.

오래된 석굴을 개조하는 경우도 많았고, 때로는 기존 석굴을 확장하거나 벽화만 덧그리기도 했다.

둔황 주변에 있는 여러 개의 석굴 유적도 추가로 쓰이게 되었다.

벼랑을 이루고 있는 역암은 아주 물러서 파기는 어렵지 않았다.

곡괭이와 삽만 있으면 충분히 팔 수 있었다.

인부들은 지붕쪽부터 파기 시작하여 벼랑 안쪽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바위부스러기는 바구니에 담아서 밖으로 운반했다.

날씨는 덥고 온몸은 흙먼지로 더러워지고 작업은 지겨웠다.

게다가 벼랑 측면을 가로질러 휘몰아치는 바람은 벼랑위의 비탈에서 모래를 실어와 인부들의 작업을 방해했다.

그들은 노동에 대한 대가의 일부로 골짜기 바닥에 있는 사찰에서 식사를 제공받았다.

사찰에서 직책을 맡은 승려들이 공사의 진척상황을 점검하고 석굴의 최종 규모를 결정하기 위해 며칠에 한 번씩 현장을 찾아왔다.

왕은 그들의 가장 중요한 후원자였기 때문에 그들은 왕이 후원하는 이 공사가 예산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잘 이루어지기를 원했다.

굴을 파는 예비작업이 끝나자 석공들은 천장과 벽을 끌로 마무리하고 바닥을 다져서 평평하고 매끄럽게 만들었다.

석굴은 작은 전실(前室)과 본당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짧은 통로가 두 공간을 이어 주었다.

본당의 벽 상단은 정간(井間)으로 장식된 천장을 향해 비스듬히 경사가 져 있고, 방 한가운데는 앞에 U자형 기단이 달린 돌벽이 서 있었다.

굴착작업이 끝나자 미장이들이 작업을 이어받아 짚과 진흙을 섞은 걸쭉한 회반죽을 돌벽에 바르고 그 위에 고운 점토액을 덧칠했다.

사막의 더위 속에서는 칠이 금세 말랐다.

이렇게 마른 표면에는 프레스코화가 아니라 벽화를 그릴 수밖에 없었다.

인부와 석공들에게 주는 품삯은 곡식과 식사였다.

미장이들은 추가로 대마씨 기름 3리터를 받았다.

석굴과 벽과 천정을 장식하기 위해 부자들은 다양한 그림을 주문했다.

사방 벽의 주요 부분에는 정토 장면과 ‘관음경’에 나오는 일화인 샤리푸트라가 마귀들을 복종시킨 설화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불화가 그려질 예정이었다.

샤리푸트라의 이야기는 당시에 인기가 높았다.

이 설화의 주인공은 인도 남부의 어느 왕국의 재상이다.

아들 여럿 중 막내만 짝을 이루지 못해서 배필을 찾았는데, 다른 왕국의 총리 딸이다.

불교의 감화를 입어 비싼 대가를 치르고 부처가 설법할 수 있는 곳을 사들였다.

그러나 왕국에 이단을 신봉하는 여섯 조사(祖師)가 있어 불만을 품고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려 왕은 재상을 문초하기 위해 옥에 가두었다.

왕은 부처를 칭송하는 재상의 말을 듣고 이 문제는 두 종교 간의 경쟁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왕은 불교 쪽이 이기면 자신을 포함하여 왕국의 백성이 모두 불교로 개종하겠다고 선언한다.

반대로 지면 샤리푸트라와 재상은 처형될 것이다.

시합을 위해 도시 남쪽에 거대한 경기장이 세워졌다.

재상이 대표로 내세운 스님은 부처님의 가장 연소한 제자 샤리푸트라였다.

이교 승려 노도차와의 숨막히는 경쟁에서 샤리푸트라의 승리로 끝난다는 설화이다.

다른 석굴에서도 비슷한 그림이 있었고 둥바오더는 수집해 둔 스케치만 찾아보면 작품의 기본 골격을 잡을 수 있었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그는 하루 아침을 석굴에서 보내면서 크기를 재고 머릿속으로 다양한 장면을 배치해 보았다.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벽에 선을 그으라고 지시했다.

그들은 실에 붉은 가루가 벽으로 옮겨지게 했다.

그런 방법으로 각 구역의 경계를 이루는 수평선과 주요부 작품의 경계를 명확히 표시하는 것이다.

석굴 남쪽 벽의 하단 부는 다시 아홉 칸으로 세분하여 샤리푸트라 설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그려 넣었고 서쪽 벽에는 설화의 다른 장면들이 그려졌다.

정오가 되면 화가들은 작업을 중단하고 벼랑 아래 골짜기 바닥에 있는 사원 식당으로 내려가곤 했다.

여기서 그들은 노임에 포함되어 있는 식사를 제공받았다.

둥바오더의 후원자는 차오위안중과 자이씨 부인만이 아니다.

둔황의 최고 부자들만이 아니라 둔황을 방문한 외국 왕족과 사절단들도 그에게 그림을 주문했다.

그는 수많은 연중행사 때 사용하거나 법요식 때 전시할 탱화와 당번(幢幡·깃발)을 그려달라는 청탁을 자주 받는다.

이 많은 행사 중에서 둥바오더에게 가장 많은 수입을 가져다준 것은 불상행진이었다.

불상행진은 호탄에서 들어온 봉축행사였다.

호탄에서는 5세기부터 이 행사가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었다.

호탄에서는 지역의 모든 승려가 참가하는 불상행진이 14일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지역의 고승들을 새긴 조상이 날마다 하나씩 행진에 가담했다.

불상을 실은 수레는 5층탑 모양이었고 20대가 넘는 수레가 동원되었다.

둔황에서는 행사기간이 더 짧고 덜 복잡했지만, 그래도 중요한 행사여서 여유가 있는 사람은 모두 공물과 장식에 필요한 돈을 시주했다.

이 행사는 석가탄신일이나 정월 대보름을 비롯하여 1년 중에도 여러 번 열렸다.

거대한 불상을 수레에 싣고 금과 은, 꽃과 깃발로 장식했다.

보살상들과 사천왕상을 실은 수레가 그 뒤를 따랐다.

행렬이 둔황 시내를 빠져나가 석굴사원으로 향하기 전에 사람들은 거리를 청소하고 물을 뿌리고 모든 성문을 거대한 장막으로 남겼다.

승려들은 향기로운 물로 불상과 보살상들을 깨끗이 씻었다.

승려들이 높이 치켜들거나 수레에 매단 수많은 깃발들은 대부분 둥바오더의 작품이었다.

대개 보살이나 사천왕상이 그려지는 깃발은 약 60cm 규격으로 생산되는 비단 한 폭으로 만들어졌다.

둥바오더는 전체 구도를 실물 크기로 꼼꼼히 스케치한 뒤에야 비로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단부에는 시주의 초상을 그려 넣을 공간을 남겨놓았지만 시주들은 차츰 제 호상을 훨씬 크게 그려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시주의 초상이 본 그림 자체를 침범하기에 이르렀다.

때로는 시주의 초상이 그림의 주제만큼 커진 경우도 있었다.

둥바우더와 실크로드 화가들의 이름은 잊혀진 지 오래되었지만, 그들의 작품은 살아남아 주목을 받고 있다.

소박하게 살았던 당시 인물들의 활동을 통해서 실크로드 상에 번창했던 둔황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시인·극동정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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