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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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5.09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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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개신교에서 사회 구원이냐 개인 구원이냐 하는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논의는 여전히 개신교의 구원관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문제일 터인데, 지금은 이런 논의가 이루어지는 일이 거의 없다.

이 문제를 두고 말이 많던 과거의 문제는 개신교의 정치적 주소가 어디여야 하느냐에 대한 자리매김을 하던 것으로, 그리고 이런 논의가 잦아들어 잠잠해 진 지금은 이미 성장할 대로 성장한 현재의 한국 개신교가 그런 문제까지 일일이 신경 쓸 필요가 없을 만큼 권력의 중심에 서 있으니, 굳이 그런 논의를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판단을 암묵적으로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다.

지역사회에 문제가 있을 때마다 여러 다른 종교나 종단에서는 해당 종교나 종단 단위의 참여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개신교는 개인적인 차원의 참여는 있으나 종단 차원의 접근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미 참여할 사안 자체가 없다면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 그러므로 개신교의 사회참여 정도는 그 종단의 건강을 진단하는 하나의 접근방식이 되기에 논리적으로 아무런 모순이 없다.

사회참여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던 때에 교회의 사회참여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던 인사들도 현재에 와서는 그 의미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현실적으로 문제가 일어났을 때의 태도는 소극적이거나 외면하는 것이 일상적인 현상인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부풀어난 내부의 무게를 추단하는 데에만도 힘이 부쳐서 외부의 문제에까지 나설 만한 기동력을 상실한 모습은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라든가 교회 성장에 대해서는 아직도 상당히 민감하고 열정이 대단하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나 마치 비만인 사람이 집안 청소라든가 이웃과의 대인관계에는 소극적이다가 먹을 것이 눈에 띄면 갑자기 눈빛이 달라지고 움직임이 활발해지는 것과 비슷한 현상은 아닌가 싶어 섬뜩하기도 하다.

종교는 시대를 비추는 등불이어야 한다.

예수는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그 빛이 새어나가지 못하게 하는 사람은 없다’고 하면서 단호하게 사회참여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과 개신교 전체 교회에 주어진 중요한 사명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현재는 사회참여의 논의가 활발하던 시대보다 그 참여해야 할 폭이 훨씬 넓어졌다.

자연·생태계의 문제가 추가되었으며, 생명윤리의 문제도 갈수록 심화되었으며,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비민주적이며 반인권적이고 반통일적인 요소들이 사회의 곳곳에 남아서 고통을 생산해 내고 있다.

이런 문제들 앞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교세의 확장보다 먼저 하느님의 정의를 앞세워야 한다.

그리고 교세 확장은 거기서 얻어진 사회적 신뢰를 기반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올바른 수순입니다.

우리의 현실을 볼 때 건강한 개신교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얼마나 맥빠지는 일인지를 모르지 않으면서도 굳이 이 문제를 들추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내가 그 개신교의 일부분으로 거기 소속되어 있는 목사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늘 나를 돌아보는 자기성찰이지 개신교 일반을 나무라거나 꾸짖으려고 하는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역량의 한계 앞에 맞닥뜨릴 때마다 전체 종교 차원이나 종단 차원에서 문제에 접근하는 다른 종교나 종파들의 건강함이 부러운 것도 사실이다.

교회의 희망과 교회의 미래를 생각할 때 교회의 자기점검과 진단은 매우 절실한 과제인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사회는 건강한 교회를 필요로 하고, 이것이 곧 하느님의 뜻이라고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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