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미어지는 그 이름 '어머니'
가슴이 미어지는 그 이름 '어머니'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5.07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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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대 주최 '부모님 감사합니다' 응모전 대상
김애령 <충청대 노인복지학과 2학년>
  "전화왔어요, 전화왔어요!"

  학교 준비로 바쁜 오후, 핸드폰 수화기를 타고 반가운 친정 오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령아, 내일이 엄마 제삿날인데, 특별한 일 없으면 얼굴 좀 보자꾸나."

삶이 바쁘다는 핑계로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는데, 친정어머니의 세 번째 기일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 친정어머니에 대한 복잡한 기억들이 돌연 엄습하여, 할 말을 잊은채 애꿎은 시계만 쳐다보고 있었다.

"오빠, 실은 내가 충청대 야간 대학교를 2년째 다니고 있거든. 그래서 이번 기일에도 못 갈 것 같아. 미안해 오빠." 진부한 핑계였다. 내가 원했더라면, 결석을 해서라도 그런 시간쯤 못 내었으랴. 차를 몰고 학교로 향하는 내내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하마터면 앞차와 충돌할 뻔했다. 내 오십 평생 동안 어머니라는 단어가 과연 나에겐 어떤 의미였을까. 평소에는 생각도 않다가 기일만 되면 곱씹어 보는 나 자신을 향한 질문이었다. 솔직히 나에겐 어머니란 존재는 그저 낯설기만 하다. 말이나 글로는 결코 다 표현할 수 없지만, 생전에나 사후에나 그토록 차갑고 아프게만 느껴지는 당신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 유년시절에 대한 기억은 육남매 중 가운데 딸로 태어나 무관심 속에서 진정한 한 인간으로서 사랑 받지 못했다는 것뿐이었다. 유독 형제들 중 학업에 충실했던 나를 애지중지하셨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때 내 나이는 열다섯 사춘기였다. 그 후, 벗어나기 어려운 가난과 더불어 남아선호 사상이 강했던 어머니는 나에게 중학교를 그만두고 돈이나 벌어 오라 성화셨다. 집안의 아들들은 모두 학교에 갔을때, 남은 덧?은 집안 살림을 거들며 닥치는 대로 부업을 하느라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늦은 밤까지 일을 했다. 그때부터 내 가슴에는 이름 모를 어머니에 대한 반감과 증오가 싹트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악착같이 중학교를 마친 나는 어머니 몰래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고, 공납금 준비를 위해 그해 겨울 공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야간작업을 병행하며 육체적으로 너무 무리했던 탓인지 기계를 만지며 잠깐 졸다가 팔이 기계 속으로 딸려 들어가는 큰 부상을 입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아 놓은 돈을 갖고 나는 결국 고등학교를 입학할 수는 있었으나, 혼자 힘으로 마치기에는 역부족이였다. 눈물을 머금고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직장을 옮겨 다니며 그렇게 사춘기를 방황으로 끝냈던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런 어머니의 중매로 남편을 만나 결혼생활을 일찍이 시작하였다.

"엄마 수업 언제 끝나. 나 닭발 먹고 싶어~ 닭발해줘어어"

그날 종일 우울했던 나를 끌어 올리려는 듯 수업 중, 딸에게서 문자가 왔다. 유난히 내가 해주는 닭발을 좋아하는 딸의 어리광스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미소를 머금고 알았다는 답장을 조심스레 보내놓고도 이전의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내 어머니의 딸이자 나의 딸의 어머니인 '나'라는 존재에 대해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어머니에게 사랑을 못 받은 설움에서이랄까. 나는 딸에게 내 어머니가 나에게 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삶을 꾸려 주리라 항상 꿈꾸고 노력해 왔다.

'어머니!'라는 그 울부짖음에 내가 그토록 이제껏 얼마나 목이 메말랐던가! 나는 나의 그런 아픔을 내 자식에 대한 한없는 모성애로 승화시켜 나 스스로를 치유하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시집을 가면 나의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스스로 위안을 삼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어머니에게 손녀딸을 안겨드렸을 때에도 무정한 나의 어머니는 그 어떤 종류의 따뜻한 위로와 손을 내밀어 주시지 않았다. 여자들은 힘들 때면 가장 먼저 어머니를 떠올린다고 하는데.

나는 어머니와의 숙제를 풀지 못한 채 당신을 이 세상으로부터 떠나보내야만 했다. 임종 전, 어머니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 손을 꼭 부여잡으셨다. "불쌍한 것, 너한테 내가 제일 못해서 미안하다,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길지도 않은 이 말을 미처 다 이해할 수 있기도 전에, 어머니는 그렇게 내 곁을 떠나셨다. 그렇게도 공부하고 싶다고 외치던 딸이 지천명의 나이를 앞두고 따낼 대학 졸업장을 어머니에게 꼭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세월은 그렇게 아무런 마무리 없이 나와 어머니 사이를 비켜가고 있다. 어쩌면 이제껏 내가 마주쳐온 부지기수의 시련들을 당당하고 꿋꿋이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아마도 나의 어머니의 지독한 냉대가 발판이 되지 않았나 이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다. 수업시간 내내 나를 응시하던 교수님의 시선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그날 나는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서랍 속 깊이 간직해 놓은 어머니의 손때 묻은 동전지갑과 노인복지회관 회원증을 꺼내 들었다. 회원증 속의 어머니의 사진을 바라보며, 어머니가 만지셨던 지갑 속 동전들을 하나하나 만져보았다. 종일 꾹 참고 있던 원망과 나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그리움의 눈물이 자꾸 흘러내렸다.

"엄마, 그래도 혈혈단신으로 육남매 키우느라 고생 많았어, 그렇게 독하게 열심히 산 엄마처럼, 엄마 딸인 나도 열심히 잘살고 있나 봐. 피는 못 속이나 봐. 학교 시험 끝나면 엄마 좋아하던 국화 꽃 사 갖고 보러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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