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서 출생… 공부위해 상경했다 축구로 인생 점철
보은서 출생… 공부위해 상경했다 축구로 인생 점철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2.26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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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초대석 조 중 연 대한축구협회장
연초부터 축구계는 시끄러웠다. 대한축구협회가 사상 처음으로 회장 경선을 실시해 세인들이 주목하는 것만큼 숱한 얘깃거리를 만들었는가 하면 "조중연의 머리를 자르겠다"는 아시아축구연맹회장의 망언 파문이 한동안 스포츠 뉴스의 머리를 장식했다. 이 두 사건의 주인공은 물론 조중연(63)이다.

지난 1월 22일 그는 대한축구협회 대의원총회에서 전국 28명의 대의원 중 18표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제51대 회장에 당선됐다. 회장이 경선으로 선출된 것도 최초이지만 정통 축구인이 협회의 수장이 된 것도 처음이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업인이나 정치인에게 지배됐던 축구계도 이젠 바뀌어야 한다"며 "앞으로 4년간 상근으로 일하면서 매일 협회에 가장 먼저 출근하는 CEO형 리더가 되겠다"고 누차 강조했다. 조중연 회장의 등장은 이처럼 우리나라 축구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예고했다.

아시아축구연맹회장의 망언은 되레 국제 축구계에 조 회장을 제대로 알리는 호기가 됐다. 앞으로 국제무대에서 경쟁할 상대가 망언을 할 정도의 위기감을 느꼈다면, 이는 곧 한국 축구의 새로운 리더 조중연의 '중량감'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중연 회장이 충북 보은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야말로 알 만한 사람들만 안다.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 88~1번지가 그의 원적이다. 이곳에서 태어나 회인초를 다니다가 4학년 때 서울로 전학했다.

그 시절,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일찌감치 서울로 올라갔다면 이유는 딱 한 가지다. 공부하기 위해서다.

공부를 잘했던 그 역시 부모의 이런 바람으로 충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삶은 공부가 아니라 축구로 점철됐다.

축구와의 인연은 중동중 3학년 때 시작됐다. 축구를 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아예 그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당시 중동중·중동고는 축구 잘하는 학교로 이름을 날리던 터라 자연스럽게 '축구 문화'에 친숙해졌다는 게 그가 축구에 입문한 이유의 전부다. 친구따라 강남간 격이다. 그때만 하더라도 대개 운동선수는 집안이 넉넉지 못한 아이들이 헝그리 정신으로 택하는 게 관행이었지만 조 회장은 달랐다. 할아버지가 일궈 놓은 양조장 사업으로 회인에서도 알아주는 부잣집 자손이었다.

보성전문(고려대 전신)을 나온 조부는 회인뿐만 아니라 인근 회남에도 양조장을 가졌었고 아버지 역시 서울 상대를 나와 6,70년대에 청주 대전 등을 돌며 산업은행에 근무한 엘리트였다.

회인 양조장 터는 옛날 현감이 머물던 관아로 지역에선 명당 중에 명당으로 꼽혔다. 넉넉한 살림이었기에 주변에 대한 씀씀이도 남달랐다. 현재의 회인중학교는 조중연 회장의 부친이 땅을 희사함으로써 세워지게 됐고, 아버지는 회인양조장을 이곳에서 20여년동안 일한 일꾼에게 헐값에 넘겼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늘 양조장 마당에 널려 있던 술밥(속칭 꼬두밥)은 특별한 간식거리가 없던 시절, 이곳 아이들의 서리 전리품이 되기 일쑤여서 지금도 회인 출신 장년찼?에겐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축구는 스포츠 중에서도 격한 운동에 속한다. 완벽한 팀워크는 물론 상황에 따라선 극단의 인내심까지 요구된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축구인들은 보수성이 특히 강하고 고집 또한 만만치 않다. 이를 좋게 받아들이면 주관이 분명한 사람들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반대로 조직운용이 녹록지 않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실제로 대한축구협회엔 이른바 주류 비주류 세력간 갈등이 오랫동안 내재돼 왔다. 지난 회장 경선 때도 이런 분위기가 첨예하게 불거져 논란이 컸다.

때문에 조중연 회장의 첫 번째 과제는 협회의 화합이다. 이에 대한 축구계 안팎의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지고 있다. 물론 조 회장도 이를 잘 알고 있고 분명한 소신을 밝혔다. "협회의 안방 살림을 책임졌던 입장에서 누구보다도 이 문제를 고민해 왔다. 문제를 잘 알기 때문에 답도 구체적으로 내놓을 수 있다. 지켜 보면 알 것이다." 정통 축구인의 최초 축구협회장 등극은 기대가 컸던 만큼 그 책임 또한 막중함을 의미한다.

-축구를 한 것에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나.

"혼자 객지생활을 했기 때문에 부모님은 고3 여름방학 때 비로소 내가 축구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긴가민가하시다가 청소년 대표로 발탁되니까 그제서야 내 아들이 축구를 잘하는구나~ 인정하는 것 같았다. 내가 택한 길에 별다른 이견이 없으셨다."

-본인의 선거공약인 매일 출근하는 회장, CEO 회장에 대해 얘기한다면.

"그동안 축구협회장은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결정됐다. 그렇다보니 상근개념이 아닌 명예직 성격이 짙었고 당연히 조직내 구성원과의 호흡과 소통도 제한적이었다. 만약 현재 조직 분위기에 문제가 있다면 이런 책임이 크다.

나는 직원들과 동고동락하겠다. 틈만 나면 지방에도 나가 축구인들을 만나겠다. 협회의 운영과 내부살림을 총체적으로 경험한 나에게 직원들이 바라는 것은 분명하다.

지금까지의 행정경험을 제대로 활용하라는 것일 게다. 조직을 건실화시켜 경쟁력을 키우려면 한발 앞서는 경영인이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잘 아시겠지만 스포츠도 이젠 경영이다."

-축구의 활성화 방안이 궁금하다.

"우선 리그별 활성화에 전력하겠다. 그러고 나서 리그간 승강제를 도입하는 게 관건이다. 올해부터는 초·중·고 리그와 여자 프로리그가 실시될 전망이다. K리그(프로)-내셔날리그(실업)-K3리그(준 프로)-U리그(대학) 간의 유기적 관계정립도 과제다."

-특별한 좌우명이라도 있으면

"체질적으로 내세우는 것을 싫어한다. 때문에 집에서는 절대로 축구얘기를 안 한다. 항상 마음속에 그리는 인생의 좌표를 굳이 꺼낸다면 진광불휘(眞光不輝. 진정한 빛은 빛이 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터뷰를 마치며 조중연 회장에게 "충북출신으로서 충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무어냐"고 기습적으로 물었다. 대답은 의외였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프로구단이 없는 도"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기회다 싶어 "그렇잖아도 얼마전 충북에 3부리그팀이 출범했다. 협회차원의 지원책은 없는가"를 재차 물었다.

이에 대해 조 회장은 분명하게 말했다.

"충북에 프로구단이 없다면 이는 도지사의 책임이 가장 크다. 우선 지사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이 문제가 풀린다.

비슷한 도세의 강원도가 모범답안이다. 강원 역시 도지사가 총대를 메는 바람에 프로구단이 생겼다.

어렵게 출범했다는 3부리그의 프로리그화도 도지사의 관심과 지원없이는 기대난망이다.

자치단체 차원에서 스스로 분위기를 만들고 자꾸 목소리를 내야 우리도 관심을 갖는다. 광역자치단체에 프로구단 하나 없다면 이건 자존심 문제 아닌가"

◈ 조중연은

1946년 충북 보은 회인에서 3남 3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회인초 4년에 서울로 전학해 재동초를 거쳐 중동중·중동고·고려대를 나왔다. 중동고에서 선수생활을 본격 시작, 고려대·해병대·산업은행 등에서 활약했고, 1965년엔 한국 청소년대표로 이름을 날렸다. 지도자로는 고려대 코치(1973~1974)와 울산현대 코치(1983~1985), 울산현대 감독(1985~1986), 중동고 감독(1990~1994) 등의 경력을 갖고 있다.

1992년 대한축구협회 이사를 맡으면서 협회와 본격 인연을 맺은 후 전무이사, 부회장을 역임했다.

1991년부터 1997년까지는 KBS 축구해설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가족으로는 부인 박현숙씨와 2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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