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궁극
종교의 궁극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12.29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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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목소리
김 태 종 <삶터교회 담임목사>

지금은 많이 잊혀졌지만 특이한 자리에서 삶의 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꾸준히 읽히는 갈홍이 썼다는 '포박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마치 요즘 군대 계급과 흡사한 것으로 상사, 중사, 하사라는 것이 나옵니다. 여기서 '士'는 '선비'라기보다는'깨달음에 이른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터인데, 한때 '신선'으로 해석된 적이 있고, 지금도 그런 해석을 따르는 이들도 제법 있는 것으로 압니다.

어쨌든 상사란 한 깨달음에 이르고 보니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 싶어 하늘로 올라간 이들이고, 중사란 역시 비슷한 동기로 속세를 떠나 산중에 은거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하사입니다. 큰 깨달음을 얻었지만 하늘로 올라가지도 산속에 숨어들지도 않고 그저 사람들과 섞여 사는 겁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저잣거리에서 어울려 살면서 전혀 아무런 티도 내지 않아 누구도 그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겁니다.

내용에는 없으나 문맥을 더듬어 행간의 생략된 이야기를 읽어가다 보면 거리에서 사람들과 술 한잔 거나하게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그러다가 해질 무렵에는 시장에서 고등어 한 손 사 들고 석양을 등에 지고 휘적휘적 집으로 향하는, 남다를 것도 새로울 것도 없어 보이는 '그저 그런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포박자에 분명히 말하고 있는 그 다음 이야기가 있는데, 그 사람은 세상이 흐트러진다고 마음 일그러지지 않고, 심지어는 난리통에도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온전한 자기 삶을 꼬박꼬박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만, 내가 보기에 이 정도면 한 종교의 창시자쯤 될 만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그 종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창시자나 어른을 따라 그 종지를 받든다는 것은 창시자와 인격적 합일을 지향하는 사람이 아니겠느냐는 계산도 나옵니다.

이쯤되면 종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해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은 내가 하는 말이 무엇일지를 이미 알아챘을 수도 있는데, 종교적이라는 말은 자신과 자신의 삶, 그리고 역사 앞에 충실한 것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종교 자체로 종교적인 성격이 드러난다는 것은 이미 종교성이 의심스러워진다는 것, 종교현상이 구체적인 삶의 모습으로 환원되고, 그 삶이 자신의 내면에서 종교로 치환되는 순환이야말로 건강한 종교의 모습이 아니겠느냐는 말입니다.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는 종교 내부에서의 종교성 확인으로 그치는 폐쇄된 범위 내에서의 공감은 그렇기 때문에 결국 그 종교가 사회적 신뢰를 얻는 일에 실패하게 되고, 그래서 마침내 쇠퇴하게 된다는 공식도 가능하다는 겁니다.

이제 폐쇄적 종교가 지닌 문제가 갈등과 대립을 낳았던 한 해가 저물어가고, 아직은 어떤 모습일지 모를 새해가 곧 열리게 되는데, 열리는 새해에는 낮은 데서부터 종교의 궁극이, 삶의 현장을 지향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확인되었으면 좋겠다며 두 손을 모읍니다. 다들 한 해를 건너오느라고 애 많이 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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