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어디에 나타나는가 ?
신은 어디에 나타나는가 ?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11.17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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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목소리
김 태 종 <삶터교회 담임목사>

요즘 리차드 도킨스라는 사람이 쓴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드러나는 종교인이라는 사람들의 사고와 태도에 종교성이 있느냐는 생각이 드는 것과 맥락을 같이하는 까닭입니다.

저자의 지식과 인식으로 볼 때 신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주장에 정직하게 맞설 수 있는 종교적 반응은 또 무엇인지를 아울러 생각하게 하기도 합니다.

나는 종교인이면서도 신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여기까지 살아오면서 때때로 신의 실재라고 생각되는 경험을 안 한 것이 아니지만, 그런 주관적 경험을 객관적으로 이해, 또는 납득시킬 수 있는 합리적인 방법을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함께 경험했으니 말입니다.

어느 종교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은 신 또는 신적 현상이 역사의 전면에 나타났다는 설화들입니다. 기독교에서 흔히 말하는 '성흔'이나 기적적인 현상들, 또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낯익은 '이차돈의 흰 피'와 같은 것이 신이 삶의 표면에 등장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들입니다. 많은 종교인이 자신의 종교 안에서 그런 신비한 현상들이 있었다거나 있다고 하는 말도 그런 설화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얘기들은 역사의 전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삶의 표면에 객관적으로 관찰될 수 있는 신의 활동을 기대하는 심리와 이어집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 당사자에게는 이만저만 좋은 일이 아니겠지만, 실제로 신이 그렇게 삶의 표면에 얼굴을 내밀고 무엇인가 개입하여 활동을 벌인다면 전체적인 인간사에서 나타나는 혼란은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무게와 크기로 나타난다는 것도 쉽게 헤아릴 수 있습니다.

나는 종교적인 모든 담론은 그 종교인의 삶을 통해 나타난다고 봅니다. 개인적인 경험이나 설화에 나타나는 신비로운 이야기들은 모두 들추지 않고 묻어두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겁니다. 그런 것들을 안에 품은 사람의 삶이 어떠냐는 것, 그 종교의 진위가 그렇게 드러나는 삶을 통해 가려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신이거나, 종교적 가르침이거나 또는 좀 황당하게 보이는 설화들이거나, 그것들을 안에 묻었을 때 겉으로 드러나는 삶의 내용이 그 종교를 판별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을 제법 많이 보고 느끼며 살았으니 말입니다.

언제나 종교는 내면이고, 표면은 삶이라는 것은 예나 제나 움직일 수 없는 사실, 그러니 자신이 몸담고 있는 종교가 말하는 종교적 내용을 서술하려는 시도는 늘 주관적일 수밖에 없고, 그것을 강하게 주장한다면 결국 폭력적일 수밖에 없음을 아울러 헤아리면 삶이 종교를 말하는 지표라는 것을 아니라고 할 사람은 없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모든 종교에서 신이 역사의 전면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현재를 살아가는 종교인들이 '삶으로 해석해야 할 물음'이지 그 자체를 '하나의 구체적 실제로서의 답'으로 본다면 걷잡을 수 없는 수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음도 헤아릴 만큼은 살았습니다.

자신이 종교인이라면 그 종교성이 삶과 이웃, 그리고 역사에 대한 정직함과 진지함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대에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신의 현존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 그러니 그 누구에게 요구할 수 없는 것이지만, 오늘의 종교적 지형 안에서 이 문제가 작은 것이 아님을 헤아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독백과 같이 늘어놓는 안타까움을 웬만한 사람이라면 헤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며 이야기를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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