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서간 진정한 '교육선구자'를 기리다
시대를 앞서간 진정한 '교육선구자'를 기리다
  • 김금란 기자
  • 승인 2008.11.06 23: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청석학원 설립자 청암·석정선생 오늘 추도식
구한말∼일제강점기∼1960년대 손꼽히는 경제인
빈민구휼, 제민활동 등 헌신적 봉사 사회 모범
"여성 가르쳐 사회로 나오게 하자" 여성교육 강조


청석학원(이사장 정성봉)은 대성초등학교부터 청주대학교까지 총 7개의 초·중·고·대학을 운영하는 충북 최고의 학교법인이다. 청석학원 산하 학교에서 배출한 인재들이 총 20만여명이고, 재학생들이 모두 1만9000여명이다.

이렇게 충북 최고의 학교법인으로 성장하기까지 청석학원의 중심에는 설립자 청암·석정 선생이 있다. 그리고 이를 기리는 청암·석정 현양사업회(회장 조성훈·이하 현양회)가 있다.

현양회는 1965년 청암 선생께서 이 세상을 떠난 후 그 이듬해부터 결성됐고 1976년 석정 선생이 운명한 후 해마다 음력 10월10일을 기해 추도식을 열고 기념사업을 해 왔던 자발적 모임이다. 설립자 두 형제의 위업을 추모하고 그 뜻을 계승하기 위한 새로운 사업을 위해 확대 결성한 것이다.

현양회는 7일 청주대 종합운동장에서 청암·석정 선생 추도식을 거행한다.

묘제와 함께 두분의 생애를 풍속화로 그렸던 이서지 화백을 초청해 특별전시회도 함께 열기로 했다.

◈ 청암·석정 선생 조선 최고의 경제인으로 활약

청암 김원근 선생(1886∼1965)과 석정 김영근 선생(1888∼1976)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1960년대까지 우리나라 경제계를 주름잡던 탁월한 사업가였다. 두 분이 운영하던 회사, 요즘으로 치면 계열사가 총 50개에 이르렀다.

도·소매업을 비롯해 광업, 제조업, 면공업, 건설, 유류판매, 운수, 창고업, 그리고 금융업에까지 진출해 부를 축적했다. 일반적으로 곡물상·어물상으로 돈을 벌었다고만 알려졌으나 두 형제는 한반도 전역과 일본, 만주에까지 진출 다양한 업종의 많은 회사를 운영했다.

청암·석정 선생은 경제흐름을 정확히 읽고, 이윤을 창출하는 데 대단한 안목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청암 선생의 경우, 19살에 곡물상으로 전국에 이름을 떨쳤다. 서른살 안팎에 전국에 지점과 출장소가 40여곳이나 되는 김원근상회를 운영했으며, 조치원과 청주 일대에 1만5000석의 토지를 소유했다.

일본에서 가마니 짜는 기술을 들여와 큰 이윤을 창출하면서, 이 기술을 농촌에 보급해 농한기 구제책으로 사용하게 했다는 일화는 청암 선생의 경제관 일면을 짐작하게 한다.

동생인 석정 선생도 상재(商材)에 관한 한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무일푼으로 찾아간 함경도 원산 땅에서 신흥재벌이라고 불릴 정도로 부를 축적했다.

러시아인에게서 청어를 사서 소금에 듬뿍 절인 뒤 이를 소금이 귀한 만주에 팔고, 대신 고추를 들여와 한꺼번에 여섯곱배기 장사를 했다는 얘기는 유명한 일화이다. 그후 석정 선생은 비슷한 방법으로 일본과 무역으로 큰돈을 벌어 들였다.

사업수단도 대단했지만 근검절약에서도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종이 한장도 아껴야 한다며 담뱃갑 포장지에 메모를 하고, 고무신 한 켤레로 1년을 났으며, 영면할 때까지 귀퉁이 뜯긴 개다리소반에서 업무를 처리했다. 청주대학교 설립자기념관에는 지금도 이 분들이 쓰던 물건이 전시돼 있다.

◈ 가난한 사람의 아픔을 생각하는 사회봉사활동

"불쌍한 사람 도와 주그레이."

청암 선생과 석정 선생이 부친에게서 받은 유훈은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불쌍한 사람을 편들어 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청암 선생과 석정 선생은 피땀흘려 모은 재산을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아낌없이 희사했다. 자신을 위해서는 구두쇠같은 자린고비였으나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운 봉사인이었다.

두분이 곡물상으로 승승장구하던 1906년 갑작스러운 대홍수에 사업장 전체가 물에 잠기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선생 형제분은 물에서 건져낸 많은 곡물과 옷감 등을 수재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이들과 아픔을 함께 했다.

1925년에는 조치원 일대에 보리황태가 끼어 농민들의 호구지책이 막연했다. 1700호 7000여명의 생계가 막막했으나 일본사람이나 지역유지들은 수수방관이었다. 두 분은 곡간을 열어 말린 밤 200석과 쌀 307석을 풀고, 하천보수공사를 일으켜 재난민들에게 일을 시키고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1929년 큰 가뭄 때는 청원군 남일면 일대에 좁쌀 3300포를 풀고, 6만평을 개간했다. 조선사람들을 만주로 이주시키고, 땅을 차지하려는 일제의 간교한 수단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개간된 땅을 사람들은 원근평, 원근뜰, 원뜰이라고 불렀다.

◈ 어려운 이웃과 아픔을 함께하다

1935년에 청주상업학교를 설립했을 때 일찍 무서리가 내리는 바람에 대단한 흉작을 기록해 끼니를 이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이때 청암 선생은 쌀 540가마라는 엄청난 곡식을 내놓고 주민들의 배고픔을 달랬다.

또한 1939년 흉년에도 보리 250가마를 주민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런가하면 1943년 강서면사무소가 불에 타자 일제가 건축비용을 주민들에게 전가시키려 하자 본인이 돈을 대어 면사무소를 신축했다. 1945년에는 피란민 구제 가옥 550동을 지었고, 1955년에는 청주경찰서를 지어 주민부담을 홀로 떠안았으며, 전쟁고아들을 위해 청원군 남일면 월오리에 현양원 교육시설을 지어 불쌍한 이들에게 미래를 위해 공부를 하도록 했다.

청주·청원 일대에 청암 선생을 기리는 송덕비가 진휼비, 불망비, 구제비, 시혜비 등 이름을 달리하며 총 8곳에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수혜를 받은 주민들이 세운 것이다.

◈ "남겨 놓으면 뭘할껴"

석정 선생의 사회봉사활동은 함경도 원산에서 주로 활동한 탓에 자료가 많지 않고, 스스로 입을 다물어버린 탓에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당시, 유망한 학생들을 동경에 유학시키고 있다는 신문기사가 보도됐다.

또한 원산의 여러 학교에 거액을 기부했으며, 말년에 됫박석유를 팔아 번 4000만원으로 김해장학회를 설립한 것으로 보아 그의 사회봉사활동도 청암 선생과 마찬가지로 일생동안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은 평소 많은 재산에 대해 '남겨놓으면 뭘할껴'라고 독백을 하며 성품대로 사회에 알리지 않고 평생 국가와 사회를 위해 봉사활동을 하며 지냈다.

◈ 교육선각자 '위대한 평범' 실천

1924년 청암 선생은 대성보통학교를 설립했다. 일제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18년동안 전체학생들에게 수업료를 받지 않았다.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청석학원의 시작이었다. 1935년 청주상업학교, 1945년 청주여자상업학교를 개교했고, 광복 후 최초의 4년제 신설대학으로 1946년 청주상과대학의 설립을 인가받고 이듬해 개교시켰으며, 대성여자중학교(1959), 대성여자상업고등학교(1960)를 계속 설립했다.

청암·석정 선생이 학교설립에 전력을 다한 이유는 철저한 교육이념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 설립 사상인 '교육구국(敎育救國)'의 신념이나 청주대학교의 '실학성세(實學成世)'의 교육이념은 '조선 사람이 언제나 일본 사람에게 속을까 보냐'하는 순수하고 강렬한 생각에서 비롯됐다고 '위대한 평범'에 기록돼 있다.

일제강점기 탁월한 조선 경제인의 자존감이 역사 속에서 구체화된 것이라 짐작하는 대목이다. 청석학원에 상업계열의 전통을 지닌 학교가 많은 것도 실학성세의 교육이념의 실천목표인 실용주의로부터 비롯됐다.

두 선생의 육영사업에 관한 열정은 다른 여러곳에서도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다. 1918년 청암 선생은 조치원에 중학교를 설립하려다 일제의 방해를 받아 실패했다. 이로 인해 청암 선생은 조치원을 떠나 청주에 정착했다.

1945년 석정 선생도 원산에 대성중학교를 설립했으나 광복 후 이념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뜻을 이어가지 못했다.

지난 1941년 청암 선생은 청주사범학교(현 청주교육대학교) 설립 부회장을 맡아, 630평 붉은 기와 건물을 지어 기부했다.

이화여전(현 이화여자대학교)이 자금난에 봉착했을 때, 석정 선생이 원산의 갑부기생 주태경 여사를 움직여 이들을 도왔는데, 이화여자대학교의 교정에 주태경 여사의 동상이 서게 된 배경이 되었다.

◈ 여성교육을 강조 실천한 선각자

우리나라 광복 5개월전인 1945년 3월 31일, 청암·석정 선생은 청주여자상업학교를 설립, 개교했다. 1952년 공립으로 이양(사실상 강제합병)됐는데 그때까지 총 449명이 졸업했다.

이후 대성여자중학교(1959)와 대성여자상업고등학교(1961)를 설립했다.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오래 전에 절감했기 때문이다. 여성이 깨어나야 아이들 교육도 제대로 되고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충청도 여성들은 바깥일에 일절 관여하지 않고 집 안에서 밥이나 짓고 아이들이나 기르고 남편이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이것은 양반고장에 어울리기는 하나 아우가 있는 원산 같은데의 여성들과 비교하면 거의 숙맥에 가까운 얼굴들이다'(위대한 평범, p.145) 청암 선생은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실천한 여성교육의 선각자였다.

청암 선생은 '여성들은 왜 남자들처럼 사회활동을 하지 못하나, 이는 교육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들에게 교육을 시켜 계몽하자, 그들을 사회로 나오게 하여 은행, 관청, 회사에서 여사무원으로 일하도록 만들자'고 생각했다. (위대한 평범. 같은 쪽)

당시 남성우월주의에 입각한 남성중심사회에서 교육선각자의 의식은 가정의 미래, 국가의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선진국가 발전의 기본은 가정교육에서 출발한다는 평범한 진리와 가정교육은 여성교육에서 비롯된다는 교육관을 가지고 이를 실천했다.

그리고 가정의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계산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여자상업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이것이 미래를 직관하는 통찰력을 지닌 교육선각자의 모습이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