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발의 예수님
금발의 예수님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11.04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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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목소리
김 상 수 <청주시노인종합복지관장>

아이가 예수님을 그린다고 열심히 크레파스를 문지릅니다. 지켜보던 엄마가 의아해서 묻습니다. "넌 예수님 얼굴을 모르잖니" 교육에 의해 이미 앎이 고착된 엄마입니다. 그 말에는 아랑곳 않고 아이가 대꾸합니다. "제가 알아서 그리게 내버려 두세요!"

인간의 삶은 성장한 환경과 습득된 지식, 교육 등에 의해 규정되고 한정 됩니다.

금발의 예수님상은 로마제국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국교화 된 것에서 기인합니다. 아프리카 흑인이 세계를 지배했다면 아마도 흑인 얼굴을 한 예수님상이 일반화 되었겠지요. 흑인의 인권이 이슈화 됐을 때 '검은 것이 아름답다(Black is beautiful)'라는 문구가 유명해졌습니다.

백인사회에서 검은 피부색은 차별과 학대의 상징이었습니다. 초대대통령이었던 조지워싱턴 이후 200여년이 지난 2008년에서야 처음으로 흑인 대통령 오바마의 당선 가능성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기득권을 가졌던 백인들의 집단적 앎이 미국 사회를 규정하고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유럽의 몇몇 나라들에서는 대마초를 피우면 법적제제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구속되고 중국에서는 사형에 처해집니다. 어느 나라 사람의 입장에 서야 정의가 되고 올바른 앎이 될까요 특정 앎이 고착되고 그 앎이 일반화되어 전체를 지배하는 사회는 대단히 위험한 사회입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태 16, 6)

예수님은 기득권을 가지고 자신들의 앎으로 만들어진 하느님만을 강요했던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되는 것을 경계하라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하느님을 규정짓고 고착화시키려는 그들의 의도에 일침을 가하십니다.

진보했다고 자부하는 21세기의 인류가 아직도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성 혹은 남성으로 규정될 수 없는 하느님의 전능에조차 정형화된 형상이 입혀지고 인간의 제한된 도덕률이 제시되어야만 이해되고 받아들여집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절대 진리이며, 절대가치이고 조건이 없습니다. 그 하느님의 사랑을 규격화하고 집단의 가치에 짜 맞추는 것은 살구색을 살색이라며 주입받던 어린 시절의 교육행태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또 그렇게 가르쳐야만 알아듣는 사회 집단이라면 성장을 멈춘 초등학생과 같습니다.

나와 남의 다름이 허용되고, 집단의 가치에서 잠시 비켜서서 다른 방향을 보고 들을 줄 아는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도화지에 그리는 예수님의 어떤 모습에도 나의 판단을 가하지 않고 아이의 소중한 느낌을 그대로 지켜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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