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성숙을 위한 제언
종교적 성숙을 위한 제언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10.28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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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목소리
김 태 종 <삶터교회 담임목사>

한때 개신교 교인들이 흔히 썼고, 지금도 포기하지 않고 있는 태도 가운데 하나로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고,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런 말을 입 밖에 내는 데에는 신중하고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는데도 그 말이 너무 쉽게 쓰이는 것을 보는 것은 내가 기독교, 그중에서도 개신교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그리 유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우려되는 것은 그 말이 자신의 종교는 옳고, 다른 종교는 그르다는 것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형식은 언제나 내용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 나는 이런 논리나 인식은 이만저만 큰 오류와 함정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자신만의 주장을 다른 이들에게 말하려는 태도가 얼마나 무례하고 위험한 것인지도 헤아려 볼 필요가 있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최씨는 독하다거나, 전라도 사람은 약삭빠르고 야비하다거나, 충청도 사람은 음흉하고 느리다는 식의 말을 쉽고도 흔하게 하곤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논리의 연장선상에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거나, 기독교만 절대진리라는 말을 가능하게 하는 인식의 배경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주장이나 입장을 충분히 수용하는 관점에서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고, 기독교만이 절대진리라고 하는 전제하에서 이야기를 조금 더 진행시켜보기로 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의 태도나 행동은 반드시 모범적일 수밖에 없어야 합니다. 그 정도의 종교를 따르며 사는 사람이라면 굳이 남을 깎아내리거나, 남의 종교에 대해 헐뜯는 듯한 인상을 보이는 경박스러운 태도를 보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 내 판단입니다.

나는 지금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느냐 아니냐, 또는 기독교가 절대진리냐 아니냐를 따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논리를 쉽게 펼 수 있게 된 데에는 어디서부터인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 그리하여 그 문제가 자신의 종교를 스스로 값싸게 하는 것이 되고마는 현실을 지적하고 싶은 겁니다.

소중한 것을 품고 있는 사람은 비록 그 소중한 것이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그의 얼굴과 분위기에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을 나는 수없이 보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다른 종교에 구원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식의 논의는 그 시발점이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통념에 흡수된 인식과 그렇게 세상을 읽어가는 방법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종교의 우열을 비교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그러면서 종교 자체를 오염시켜 스스로 비종교적 태도를 보이게 된 것은 아니냐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떤 종교에 몸담고 있던 간에 모든 종교인은 종교를 통해 자신의 성숙을 도모하는 방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종교적 가르침이 인격의 도야를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종교적 가르침에 충실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수반되는 것이 인격의 도야라는 것을 부정한다면 그런 종교는 결국 도태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교를 통해 다시 인간의 인간됨을 묻게 되고, 그를 통해 자신과 삶, 그리고 세상에 대해 진지하게 되는 성숙이 가능하다는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든든함과 기쁨을 누리고 싶은 것, 그리하여 종교가 시대의 등불이고 희망이라는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마당을 꿈꾸는 것, 그저 꿈으로 그칠 일은 아니지 싶어 다시 한 번 곱새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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