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신분사회 경계해야
세습·신분사회 경계해야
  • 권혁두 기자
  • 승인 2008.10.07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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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권 혁 두 부국장 <영동>

일본은 정치적 세습이 흔한 나라이다. 집권 자민당의 중의원 절반이 선대로부터 의원직을 물려받은 세습 정치인이다. 3세, 4세의원도 허다하다. 고이즈미를 비롯해 아베 신조, 모리다 요시로 등 전 총리 3명이 모두 3세 정치인이고 후쿠다 야스오 직전 총리는 아버지에 이어 총리에 오른 사람이다. 현 아소 총리의 내각도 절반 이상이 쟁쟁한 가문의 세습의원들로 구성돼 '명품내각'으로 불린다.

권력의 세습 못지않게 빈부의 세습도 깊어져 대를 잇는 생활보호대상자가 4분의 1에 달한다고 한다. 학력의 대물림도 고착화하는 추세다. 2006년도 도쿄대 재학생의 47.8%가 연수입 950만엔 이상의 고소득가정 출신이다. 반면 도쿄의 한 빈민촌 초·중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학력평가에서는 모든 학생이 전과목에서 평균점수에 미달했다는 충격적 결과가 나왔다. 빈한한 출신이 그나마 균등한 기회를 누렸던 출세수단이 교육이었다. 이를 악물고 밤새워 공부하며 두드리면 열리던 탈출구가 이제는 유한계층에 독과점된 것이다.

일본 지식인들은 세습사회에서 초래될 병리적 현상들을 걱정하고 있다. 신분상승의 기회가 봉쇄된 상황에서 소외계층의 자포자기와 저항의식은 그 자체로 '시한폭탄'이기 때문이다. 15명이 목숨을 잃은 지난달 오사카 비디오방 방화사건, 지난 6월 7명이 살해당한 도쿄 도심의 흉기 난자사건 등 대상도 동기도 없는 이른바 '묻지마 범죄'들이 신분사회로 가는 과정을 경계하라는 경고로 꼽히고 있다. 오사카의 범인은 실업자이고, 도쿄의 범인은 파견직원이며 범행동기는 '그저 살기가 지겨워서'다.

일본은 파견직원 등 비정규직이 1700만명으로 전체 근로자의 3분의 1에 달한다. 20% 정도였던 90년대에 비해 엄청나게 늘어난 수치다. 경제대국의 그늘에서는 경제·사회적 약자들이 꾸준히 양산된 것이다.

지금까지 일본 얘기를 했지만 무대만 한반도로 바꾸면 그야말로 재방송이 된다. 일본의 '명품내각'과 무늬가 비슷한 '강부자내각'이 들어선 것과 대책없이 벌어지는 경제적 양극화 등이 그렇다. 돈 잡아먹는 교육은 '절대 용을 낼 수 없는 개천'을 만들어낸 지 오래이고, 생활보호대상에서 탈출하려면 로또를 사라는 말이 공공연해졌다. 신분세습제의 도래를 알리는 농후한 징후들이다.

그런데도 종부세 폐지, 교육 자율화, 수도권 규제완화 등등 정부가 내놓는 정책들마다 양지로만 향한다. 우리 사회에 '노블레스 오블리주' 기풍의 싹수라도 보인다면 정책의 일방성도 눈 감아줄 만하지만 사정은 영 아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기업이 장애인 의무고용 법규를 위반해 92억원을 벌금으로 냈다고 한다. 법이 규정한 약자에 대한 배려조차 외면하고 돈으로 법을 사버린 비정한 자본이다. 이 기업을 소유한 재벌가에서는 경영권 세습절차가 한창이다.

얼마 전 타계한 배우 폴 뉴먼은 "우리처럼 행운을 타고난 사람들은 불운한 사람들에게 행운을 나눠줘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사실 그가 타고난 행운은 잘생긴 외모밖에 없다. 재능을 키워 오랫동안 은막을 누빈 것은 스스로 노력한 결과이다. 그렇지만 그는 행운아를 자처하며 식품회사를 운영해 번 돈까지 1억 달러가 넘는 재산을 자선사업에 올인했다.

'폴 뉴먼식 사고'를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 사회에서는 정책이 균형과 분배를 조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층간, 지역간 증오와 충돌로 사회통합이 불가능해지는 시기가 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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