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더 천천히…
천천히, 더 천천히…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8.26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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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목소리
김 태 종 담임목사 <삶터교회>

언제부터인가 나는 빠른 것보다는 느린 것을, 앞서 가는 것보다는 뒤처지기를, 윗자리보다는 아래쪽을, 두드러져 특별한 소수보다는 평범한 다수에 속하기를, 그리고 이기는 것보다는 지는 것에서 삶의 길을 찾는 연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에나 서두르지 않게 되었고, 그러는 사이 "즉답치고 정답 없다'는 말을 즐겨 하게 되었습니다.

두어 해 전, 허리를 심하게 앓은 일이 있습니다. 오릿길을 걷는 데도 서너 번 쉬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통증이 몹시 컸습니다. 아마 그때 병원에 갔더라면 당장 치료를 받지 않으면 평생 허리를 못 쓰게 될 거라는 진단을 받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걸 얼른 고칠 생각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픔을 지켜보고, 그 아픔에 뒤따르는 불편을 지켜보면서 왜 왔느냐고 묻곤 했습니다. 그렇게 서너 계절을 보내는 동안 그게 왜 왔는지를 알게 되었고, 아픔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하여 지금은 다시 멀쩡하게 잘 쓰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불리한 것이 왔을 때, 또는 무엇인가 목적하는 것이 있을 때에 서두르게 됩니다. 얻고 싶은 것을 빨리 얻고, 괴로움을 주는 것으로부터 서둘러 벗어나려는 겁니다. 그것이 그 자체로는 잘못이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생기는 뒤탈은 감당할 수 없는 크기와 무게로 다가와 삶을 짓누릅니다. 그래서 피어야 할 꽃이 피지도 못하고 쭈그러들고, 맺힌 열매가 여물지도 못하고 떨어지는 것과 같은 삶꼴을 무척 많이 보아왔고, 지금도 종종 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바늘 허리에 실을 매어 쓸 수 없다는 말이 어느 사이엔가 퇴색해진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급성장과 기적 같은 발전이 성공처럼 보이고, 로또복권에 당첨되는 것이 행운으로 인식되는 시대에 바늘 허리에도 얼마든지 실을 매어 바느질이 가능한 것이 아니냐는 착각을 하게 된 건 아닌가 싶은 겁니다.

나는 바느질은 잘 모릅니다. 그런 내가 보기에도 바늘 허리에 실을 매는 짓은 바느질이 아닙니다. 그 바늘로 시도한 봉합이 바늘이 꽂혀 있을 동안에는 둘이 붙어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바늘이 지나가고 나면 내내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음, 그러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바느질과는 견줄 수 없는 다양한 문제들이 뒤따른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느림의 의미를 되찾을 때입니다. 그건 누가 말해도 될 것이지만 종교적 언어로 이 시대에 그보다 적절한 것이 없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역사나 인생에 있어 기적이란 있을 수 없다고, 기적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가운데서 삶을 경영하는 것을 가르치는 종교를 꿈꾸는 겁니다. 솜씨있는 아낙이 바느질을 하듯이, 바늘귀에 실을 꿰어 한 땀 한 땀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고 꼼꼼하게 정성을 다하여 해 나가는 바느질과 같은 인생경영을 생각할 시점이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자리라는 생각이 드는 까닭입니다.

오래오래 지속될 것 같던 더운 여름이 짙어지고 무르익다가 마침내 열리는 가을, 그게 곧 하늘의 뜻이고, 신의 섭리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계절, 특별한 일이 아닌 평범한 방법, 무슨 엄청난 방법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차츰차츰 달라지는 삶, 한순간에 붉게 물들인 것은 단풍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어느 사이에 울긋불긋 온 천지를 물들이는 가을의 축제를 떠올리며,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다시 한 번 헤아리는 동안 떠오르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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