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과 수단을 혼돈할 때
목적과 수단을 혼돈할 때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6.10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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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목소리
김 상 수 <신부>

피정을 다녀왔습니다. 선배 신부님의 훌륭한 강의를 들으며 '왜 사제가 되려고 했나 어떤 사제가 되어야 하나' 라는 제 삶의 목적이었던 부분을 돌아보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삶의 지표로 삼는 좋은 목적들은 참 많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좋은 목적을 위해 좋은 수단들이 행사되는 훌륭한 과정의 삶이어야 합니다. 바쁘게 반복되는 생활을 하다 보면 삶의 목적자체가 모호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싸하게 치장한 삶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전 존재가 수단과 도구가 돼버리는 거지요. 사제가 되겠다는 1차적인 목적은 이루어졌지만 애초에 그렸던 참 좋은 사제로서의 정당하고 좋은 수단들을 행사하며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말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치르고 있는 지금의 상황도 한 가지 목적 성취를 위해 절차적 과정들이 무시되고 수단과 목적이 혼돈되면서 생겨나는 예견되었던 결과입니다. 과정과 배려와 이해와 기다림이 배제되었던 지난 역사의 결과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성이 어우러져서 만들어 가는 과정과 삶이 기계처럼 같은 속도와 규격으로 작동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연이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배워야 합니다.

소가 성장하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목적과 수단을 혼돈한 인간의 기계적 판단이 동물성 사료를 주입하여 소도 죽이고 사람도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더 잘 살겠다는 목적을 위해 우리가 행사한 수단들은 폭력과 야만성이 내재한 기계화와 과학화였습니다. 더 빨리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행사했던 수단들은 땅과 생명과 공동체를 파헤치고 훼손하고 무시했습니다. 뒤늦게야 우리들이 간과했던 소중한 가치들을 복원하고 치유하는 데에 엄청난 비용을 치러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관여하는 국제 모임 중에 라르쉬공동체를 통해서 배웠던 소중한 체험 하나가 있습니다. 지적장애인이 과일을 따는 날이었습니다. 함께 하는 봉사자는 과일 따는 것을 거들지도 않고, 지켜만 볼 뿐 재촉도 하지 않고 각자 일을 했습니다. 한국인인 저는 상당한 문화의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 식대로라면 얼른 도와서 한 자루를 채우고 장애인과 협조자가 많은 일을 했다는 것에 가치부여를 하는데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과일 하나를 온전히 그의 방법대로 따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주 종일 10개를 못 딴다 하더라도 숫자가 갖는 의미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라르쉬가 가진 원래의 목적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잘 살겠다는 우리들의 목적은 무엇을 어떻게 왜 잘 살겠다는 것인지, 깊이 있는 성찰과 고민이 개입되지 않았습니다. 물질적 가치, 외부적 평가, 말초적 가치판단 등에 의지한 개인의 목적들이 모인 사회와 국가의 향방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불행입니다. 좋은 사제가 되기 위해 좋은 말만을 보따리에 싸서 다니느라 전전긍긍하지 않았는지, 그 말 보따리가 혹여 나의 목적이지는 않았는지, 대한민국이 목적과 수단을 혼돈하지 않기를 염원하는 이름 없는 시민과 함께 저도 촛불 하나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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