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부유함이란
종교적 부유함이란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6.03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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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목소리
김 태 종 <삶터교회 담임목사>

현재 종교에 몸담고 있지는 않으나 어떤 종교에든 나가고 싶다는 사람이거나, 지금 어떤 종교 안에서 갈등을 겪고 있다는 사람들을 볼 때 나는 서슴없이 종교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하거나, 그 종교에서 한시라도 빨리 떠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해 줍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뜻밖이라는 듯 놀란 눈으로 보곤 하는데, 그런 자리가 한두 번 있었던 것이 아니니, 언뜻 보기에 내가 종교를 해치는 사람으로 비칠 수도 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 내가 참으로 내 속을 드러낸다면, 나는 진심으로 종교를 사랑합니다. 내가 몸담고 있는 기독교를 사랑할 뿐 아니라, 다른 종교들 또한 이웃으로 사랑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종교에 사람들이 다가서는 것을 할 수만 있다면 막고 싶습니다. 종교가 살이 오르거나 힘을 지니게 되면서 종교 본연의 자세에서 벗어나 어설픈 장사꾼으로 전락하는 모습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까닭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의 종교는 배가 부르고 살이 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에서 살찐 종교의 위험을 지적하고 경고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지만, 문제는 전혀 시정되지 않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고, 제정신을 갖고는 현재의 종교라는 범위 안에서 정상적인 종교인이 된다는 것은 기대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수준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 내 진단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종교에 해롭게 보이는 종교지도자가 될 수밖에 없는 말과 몸짓을 하게 되었고, 이미 그렇게 비쳐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쉽게 포기되지 않을 듯싶은데, 이런 내 속이 마냥 편안한 것만은 아닙니다.

종교와 부의 양립은 가능하냐는 물음에 이론상으로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고, '얼마든지 좋은 쪽으로의 활용이 가능하다'고 대답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현실적으로는 결코 '그렇지 못하다'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음, 현실적 무능이 오히려 종교적 유능일 수 있고, 그리하여 미련하도록 현실적 감각이 떨어지는 종교지도자가 사무치게 그리운 것이 오늘날의 종교현상이라는 것이 움직일 수 없는 내 생각입니다.

그런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잘 되는 것을 늘 경계합니다. 나도 배부르고 살찌면 저들과 똑같이 될, 아니 오히려 한술 더 뜰 속물임을 모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돈이 자리잡고 중심을 차지한 마당에 이미 하느님이나 부처님은 종교 밖으로 쫓겨난 지 오래. 종교적 언어는 무성하지만 종교적 진리는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는, 그리하여 종교적 외형은 어디에나 가득하지만 그 실천이 도리어 위험한 것으로 치부되는 상황. 그러나 문제는 바깥의 일이 아니라, 늘 내 안의 것이라는 시각이 보다 종교적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거나 내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부득이 종교를 찾으려 하거나, 종교 안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들, 그리고 종교로 인해 상처를 입은 사람을 보면 일어나는 부끄러움과 죄책감에서 좀 더 자유롭고자 하는 것이, 현실 종교를 말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종교적 부유함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한 때, 희망이 어디 있는지를 찾는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는데, 떠오르는 해가 어제처럼 또한 희망이고, 일기예보는 오늘 이따가 비까지 내린다고 합니다. 여름으로 치달아가는 날씨를 또 어떻게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지를 헤아리며 열리는 하루를 노래하는 새소리가 들립니다. 산뜻한 이 아침의 소식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누구일지를 헤아리며 글을 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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