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에게 쓰는 편지
제자들에게 쓰는 편지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5.29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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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발언대
반 은 섭 <옥천중학교 교사>

수학자이기에 앞서 무한의 문제를 성찰한 철학자 게오르그 칸토어는 무한에도 작은 무한과 훨씬 더 큰 무한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 동료 데데킨트에게 'I see it but I don't believe it'으로 시작되는 장문의 편지를 썼다. 칸토어의 당황이 역력하다. see를 understand 정도로 해석한다면 "나는 그것을 이해했지만 도저히 그 사실을 믿을 수 없다"란 말이다.

자연수의 개수와 짝수의 개수는 같고 실수의 개수는 자연수의 개수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인데 논리적 사고에 의한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이해되지만 마음으로는 수용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눈을 감고 수 하나만 생각해 보라는 질문을 하면 대다수 사람들은 자연수를 생각하는데 수학적으로 자연계에 존재하는 수들 중에 하나가 선택될때 그 수가 자연수일 확률은 제로(0)다. 수학적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을 우리는 경험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다.

칠판에 열심히 써가면서 목이 터져라 설명해 보지만 감동을 받는 학생이 많지 않은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수학과 불가분의 관계인 논리적 사고와 이성적 사유가 심리적 불안정기에 있는 학생들 마음에 와 닿는 이야기를 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목에 걸고 다니는 MP3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나 몰래 보는 만화책 속에 등장하는 이성을 통해서 학생들은 세상에 대해 조금씩 알아간다. 신기하게도 반대의 경우도 있다. 잘짜인 이성적 체계에 대해서도 모종의 쾌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진리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므로 누군가가 절대로 알려줄 수 없으며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라는 성현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스탠드 불빛 아래로 펼쳐져 있는 글과 백지에 써 내려가는 잘 짜여진 문제풀이 속에서 희열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이성의 무게가 무겁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교사로서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러한 든든함을 느끼지 못하고 학교를 졸업한다는 것이다.

수학에서 다루는 증명 과정, 문제 해결의 진행 단계 속에는 논리적인 엄밀성과 잘 짜여진 이성적 체계에 대한 아름다움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학교를 떠난다. 가끔 시험 문제지의 맨 뒷면을 보지 못해 시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다 못 푼 학생이 나온다. 몰라서(don't know) 못 푼 것과 있는지 몰라서(unknown) 못 푼 것은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느낌의 강도가 다르다.

중·고교 시절에 습득해야만 하는 것이 예술적인 감수성과 논리적 사고력이다. 자전거의 두 바퀴가 잘 돌아가야 하듯이 예술적인 감수성과 논리적 사고력 역시 동시에 계발되어야 한다. 헤르만 헤세는 소설 '지(知)와 사랑'에서 종교적 윤리와 이성적 사고로 점철된 나르치스와 도전적이고 자유로운 예술 정신을 몸으로 표현하는 골트문트를 한 맥락으로 조화시켜 놓았다. 나르치스가 평생 몸담아 온 성스럽고 고요한 종교와 학문의 세계보다 골트문트의 예술적 영혼과 풍부한 감수성이 더 훌륭하고 값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읊조리는 장면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상에 있는 모든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나이가 지긋한 분에게 신이 내려와 "젊음을 되돌려 준다면 자네의 모든 것을 다 내놓을 수 있겠는가"라고 물어봤더니 대답을 듣지 않아도 우리는 그의 결정을 알 수 있다. 젊음이 가장 큰 재산이다.

나의 학생들은 세상에서 제일 부자라는 자부심을 갖고 생활했으면 좋겠다. 오랜 시절 해마다 조금씩 성장을 거듭해 나이테를 더해가면서 삶을 쌓아가는 한그루 나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일깨워 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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