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腹]를 먹는 배꼽
배[腹]를 먹는 배꼽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5.09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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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문학 칼럼
박 홍 규 <교사>

자본주의 현실을 평가하는 숫자들, 통계나 그래프는 넘치도록 많다. 강변에 널려 있는 각양각색의 자갈들처럼, 아무거나 몇 개 집어 들면 또 어떻게든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무기가 되거나 방어하는 수단이 된다. 같은 자료가 혹은 심각한 위기의 원인으로 지목되는가 하면 다른 자들에게서는 빛나는 성과를 떠받치는 자랑거리로 둔갑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우리와 같은 비전문가들은 정신을 집중하여 꼼꼼하게 책을 읽는다 해도, 통계자료를 인용하며 정교한 논리를 펼친다거나 탄탄한 근거를 가지고 결론을 내기보다 뭉쳐있는 생각의 덩어리를 끌어안게 되거나, 독서 후에 남겨진 어떤 이미지로 정황을 가늠하게 된다.

책이 이끄는 방향을 따라가다 우선 맞닥뜨리는 자본주의의 풍경은 '배[腹]를 먹고 있는 배꼽'의 형상이다. 배[腹]는 순박하고 배꼽의 입은 아귀 같다. 또는 어미가 마비시켜 굴에 넣어 둔 애벌레를 갉아먹고 밖으로 나와 새로운 개체로 살아가는 나나니벌이 아니라, 자기 죽을 줄 모르고 숙주를 무지막지하게 공격하고 끝내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어리석은 바이러스의 형상이다. 젊잖게 말하면 하석상대이고, 돌려 말하면 곶감꼬지에서 감 빼먹기에 다름없다. 이제 자본주의의 달콤한 감은 몇 개 남아있지 않다. 그래도 여전히 자본주의라는 흐름은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도도하다.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감을 아낌없이 먹어치우고 있다. 기어이 마지막 한 알까지 마저 빼 먹어야 저 흐름의 끝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판에 자본주의 자체가 의심할 여지없이 당연한 것인가라는 의문은 끼어들 자리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의심을 멈추거나 철회할 수는 없다. 배를 먹어치우는 배꼽을 어떻게 정당화하고 용납할 수 있겠는가. 하석상대의 어리석음이 사전 밖으로 뛰쳐나와 횡행하고 있는 모습을 눈 뻔히 뜨고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방법이야 많다. 자본주의 물결 한 가운데로 들어가 온몸으로 막아설 수도 있고, 혹은 이만큼 거리를 두어 자리 잡고 팔짱끼는 관객의 위치에 설 수도 있다. 발목 정도 잠기는 가장자리로 나와 무릎이며 허벅지까지 더 이상 잠기지 않게 버티는 방법도 가능하며, 아예 거기에서 등을 돌려 벗어나는 것도 방법 중 하나이다.

태어난 것은 사라진다. 언젠가는 소멸하게 되어있다. 얼마나 세월이 걸리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거기에 페르낭 부르델이 말한 대로 자본주의 내적 모순의 심화와 외적 충격 그리고 타당한 대안의 존재가 자본주의를 퇴화시킬 것이라는 전망도 무리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자원의 한계 특히 화석에너지 고갈과 환경위기가 자본주의의 외적 충격으로 작용하고 있고, 자본주의 이후 타당한 대안으로 '재생에너지 시스템에 기반을 둔 연대와 지속가능한 경제 사회'가 부각되고 있는 한편,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으로 가장 심각한 것은 도덕성 붕괴라는 지적은 설득력이 크기 때문이다. 80대 20의 사회를 지나쳐 95대 5의 사회경제구조를 쫒는 발상이며 정책들이 어찌 도덕적이라 할 수 있을까. 상식의 경계도 가볍게 뛰어넘는 오만과 편협함의 전형이다. 오직 경제논리가 전가의 보도로 휘둘러지고 있는 가운데 공동체의 삶은 갉아 먹히는 숙주로 전락해버리고 같은 속도로 내적 모순은 심화되어 간다. 우리 삶의 근본 터전을 갉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형상으로 기회만 엿보는 경부운하가 그러한데, 여기에 만의 하나 어느 불행한 누군가 광우병에 걸린다면 그것이 마지막 남은 곶감을 먹어버린 꼴에 비유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뭉쳐있던 생각의 덩어리는 이렇게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그것은, 그렇다면 이제 어떤 방법을 선택할 것인가이다.

(읽은 책 엘마 알트파터, 자본주의의 종말. 동녘,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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